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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과 유아 사회적 조망수용능력 (공감의 문, 방식, 실험 결과, 활동의 질)

by seulki87 2026. 5. 28.

"여기 내가 나무 그릴 거야." "나도 여기 집 그리고 싶은데 자리가 없잖아." 아이들이 큰 도화지 앞에 모여 앉아 서로 옥신각신하는 장면, 유아 교육 현장에 있다 보면 낯설지 않습니다. 저도 그 상황을 수없이 목격했고, 그 갈등이 사실은 엄청난 배움의 순간이라는 걸 한참 뒤에야 제대로 이해하게 됐습니다.

그림책과 유아 사회적 조망수용능력, 그림책이 공감의 문을 여는 이유

유아 교육에서 그림책은 단순히 글자를 읽는 교재가 아닙니다. 그림책은 아이가 아직 직접 경험하지 못한 감정과 관계를 안전하게 간접 체험하게 만드는 매개체입니다. 특히 또래 관계 경험이 점차 넓어지는 유아기에는, 그림책 속 상황을 통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경험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여기서 사회적 조망수용능력(social perspective-taking ability)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사회적 조망수용능력이란 다른 사람의 입장과 감정, 생각을 이해하고 그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저 친구는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를 상상해 보는 힘입니다. 유아기에는 아직 자기중심적 사고가 강하기 때문에, 이런 능력은 자연스럽게 생기기보다 반복적인 경험 속에서 서서히 발달합니다.

 

그림책은 바로 이 과정을 돕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 중 하나입니다. 동물 친구들이 함께 마을을 꾸미거나, 친구와 다투었다가 화해하는 이야기를 읽을 때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등장인물의 감정을 따라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정서적 동일시(emotional identification)입니다. 정서적 동일시란 이야기 속 인물의 감정과 상황을 자신의 일처럼 느끼며 공감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아이들은 "왜 울었을까?", "왜 혼자 있고 싶었을까?"를 생각하며 타인의 감정을 자기 안으로 가져오게 됩니다.

 

제가 실제로 협동조형활동 전에 그림책을 읽어주며 느낀 점도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그림책 없이 바로 활동을 시작했을 때는 "내가 먼저 할래", "이건 내 거야" 같은 말이 자주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림책을 먼저 읽고 난 뒤에는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아이들이 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 친구는 왜 속상했을까?", "같이 했으면 좋았을 텐데" 같은 이야기를 스스로 꺼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짧은 대화 하나가 이후 협동 활동 전체의 흐름을 부드럽게 바꿔놓았습니다.

 

특히 갈등과 화해의 과정이 담긴 그림책일수록 아이들의 반응이 더 깊었습니다. 처음부터 모두 사이좋게 지내는 이야기보다, 오해하고 다투다가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서사에 훨씬 오래 머물렀습니다. 제 경험상 아이들은 완벽한 주인공보다 실수하고 속상해하는 인물에게 더 쉽게 감정을 이입했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사이좋게 지내자"는 교훈을 직접 말하는 책 보다, 감정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이야기가 훨씬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림책 속 그림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유아들은 아직 언어보다 시각 정보에 더 민감하기 때문에, 등장인물의 표정이나 거리감, 색채 변화 같은 시각적 단서를 통해 감정을 읽어냅니다. 예를 들어 혼자 떨어져 있는 작은 캐릭터를 보며 "외로운가 봐요"라고 말하거나, 얼굴이 빨개진 그림을 보며 "화난 것 같아요"라고 반응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그림 감상이 아니라 감정 읽기 훈련에 가깝습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활동 이후 아이들의 변화였습니다. 함께 만든 공동 작품을 보며 "이건 친구가 도와줘서 된 거예요"라고 말하거나, 친구가 어려워하자 먼저 옆에 가서 도와주는 모습이 이전보다 자연스럽게 나타났습니다. 배려를 규칙처럼 가르쳤을 때보다, 그림책을 통해 감정을 먼저 경험하게 했을 때 훨씬 오래 남는다는 걸 현장에서 여러 번 느꼈습니다.

 

결국 그림책은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아이가 타인의 마음을 상상해 보는 연습을 시작하게 만드는 작은 공감의 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조망수용능력

협동조형활동이 사회적 조망수용능력을 키우는 방식

사회적 조망수용능력(social perspective-taking ability)이란 타인의 생각, 의도, 감정을 추론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저 친구가 슬프겠다"를 느끼는 것을 넘어, 왜 그런 감정을 갖게 됐는지, 그 친구의 입장에서 어떤 선택이 합리적인지를 추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연구 결과를 보면 이 능력은 세 가지 하위 요소로 나눌 수 있습니다.

  • 타인의도 조망수용능력: 상대방이 어떤 의도로 행동했는지 파악하는 능력
  • 타인사고 조망수용능력: 상대방이 어떤 생각과 지식을 갖고 있는지 추론하는 능력
  • 타인감정 조망수용능력: 상대방이 현재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지 이해하는 능력

협동조형활동은 이 세 가지 능력을 동시에 자극합니다. 아이들이 하나의 작품을 함께 만들려면 끊임없이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고, 생각을 예측하고, 감정을 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현장에서 이 과정을 직접 지켜봤는데, 처음에는 서로 자기 것만 주장하던 아이들이 활동을 거듭할수록 "그럼 여기는 네가 해봐, 나는 저쪽에 그릴게"라고 자연스럽게 조율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변화가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피아제(Piaget)는 유아기 아이들이 자기중심성(egocentrism)이 강하다고 봤는데, 여기서 자기 중심성이란 자신의 관점 외에 타인의 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협동조형활동은 바로 이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는 연습을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제공합니다.

실험 결과가 말해주는 것

경기도 고양시의 만 5세 유아 5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9주 동안 주 2회, 총 18차시에 걸쳐 그림책 활용 협동조형활동을 진행한 실험집단은 비교집단에 비해 사회적 조망수용능력 총점에서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높은 점수를 기록했습니다(t=4.672, p <. 001). 세 하위 요인인 타인의도, 타인사고, 타인감정 조망수용능력 모두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났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성별에 따른 차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t=0.080, p=.936). 이는 사회적 조망수용능력이 선천적 성향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험을 제공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남아든 여아든 협동 경험이 쌓이면 타인의 관점을 이해하는 능력이 향상된다는 의미입니다.

 

비교집단은 동일한 그림책을 읽은 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그리는 활동을 했습니다. 같은 그림책을 활용했음에도 불구하고 협동 경험 없이는 능력 향상 폭이 훨씬 적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유아의 사회적 발달에서 또래 상호작용이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결과입니다(출처: 한국유아교육학회).

 

이원변량분석(Two-way ANOVA)이란 두 가지 독립 변수(이 연구에서는 집단과 성별)가 하나의 결과 변수에 미치는 영향을 동시에 분석하는 통계 방법입니다. 이 분석에서도 집단과 성별 간의 상호작용 효과는 유의미하지 않았습니다(F=0.006, p=. 939). 쉽게 말해 협동조형활동의 효과는 남녀 구분 없이 동등하게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교사의 역할이 활동의 질을 결정한다

제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협동조형활동은 그냥 아이들을 같은 공간에 앉혀 놓는다고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교사가 어떤 태도로 개입하느냐가 활동의 질을 완전히 바꿔놓습니다.

 

저도 초반에 실수한 게 있는데, 아이들이 갈등을 보이면 너무 빨리 해결책을 제시해줬다는 점입니다. "그럼 여기다 나무 그리고, 집은 저쪽에 그리면 되잖아"라고 교사가 먼저 정리해 버리면, 아이들이 스스로 조율하는 경험을 할 기회가 사라집니다. 유아교육에서 비계설정(scaffolding)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는 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수준보다 조금 높은 과제를 교사가 적절히 지원하면서 도전하게 하는 교수 전략을 말합니다. 협동조형활동에서 교사의 역할은 해결사가 아니라 이 비계설정자여야 합니다.

 

또 한 가지는 결과물에 집중하지 않는 것입니다. 작품이 예쁘게 완성됐는지보다, 아이들이 서로 얼마나 이야기를 나눴는지, 의견 충돌 후 어떻게 합의에 이르렀는지를 교사가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누리과정의 사회관계 영역에서도 또래와의 협력과 갈등 해결 경험을 핵심 목표로 제시하고 있는 만큼(출처: 교육부), 교사가 이 과정을 의도적으로 설계하고 관찰하는 시선이 필요합니다.

 

평소 자기 주장이 유독 강했던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처음으로 "그래, 네 말대로 해보자"라고 말했을 때의 그 순간, 저는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많은 내면의 작업을 거쳐 나온 것인지를 느꼈습니다. 협동조형활동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도화지 위의 그림이 아니라 그 아이의 마음속 변화였습니다.

 

협동조형활동을 통한 사회적 조망수용능력 향상은 단기간의 효과로 끝나지 않습니다.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습관은 이후 학교생활, 또래 관계, 나아가 사회적 관계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유아기가 이 능력을 형성하는 결정적 시기인 만큼, 그림책과 협동조형활동의 조합은 교육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할 가치가 있습니다. 단, 활동을 설계할 때는 그림책 선정부터 교사의 개입 방식까지 세심하게 준비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충분히 부딪히고, 충분히 이야기하고, 스스로 답을 찾아갈 시간을 주는 것, 그게 교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https://kookmin.dcollection.net/public_resource/pdf/000000798736_2026052813063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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