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그림책은 졸업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많으시죠? 저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교실에서 아이들과 직접 책을 읽으며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림책을 충분히 경험한 아이일수록 줄글책으로 넘어가는 속도가 오히려 더 자연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림책은 줄글책을 위한 디딤돌이다
독서 발달(reading development) 관점에서 보면, 그림책과 줄글책은 완전히 다른 단계가 아닙니다. 독서 발달이란 아이가 글자를 읽는 능력을 넘어서 이야기를 구조적으로 이해하고 감정과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까지 성장해 가는 전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림책은 이 과정의 초반부를 단단하게 채워 주는 역할을 합니다.
제가 교실에서 직접 관찰한 바로는, 그림책을 많이 접한 아이들이 이야기의 흐름을 말로 설명하는 능력이 눈에 띄게 뛰어났습니다. 단순히 줄거리를 암기하는 게 아니라, 등장인물의 감정이 왜 그렇게 됐는지, 다음 장면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를 스스로 추론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서사 이해력(narrative comprehension)입니다. 서사 이해력이란 이야기 속 사건들의 인과관계와 흐름을 파악하는 능력으로, 줄글책을 읽을 때 가장 먼저 필요한 핵심 역량입니다.
반면, 그림책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고 일찍 줄글책으로 넘어간 아이들 중 일부는 글자는 잘 읽어도 "이 이야기가 왜 슬픈 건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글을 해독하는 것과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래서 줄글책으로 전환하는 시기를 무리하게 앞당기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아이들이 한글을 떼고 나면 바로 줄글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것보다 아이가 그림책을 보며 이야기를 얼마나 풍부하게 나눌 수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을 단서로 이야기를 추측하고, 등장인물의 감정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 아이는 이미 줄글책을 받아들일 준비가 상당 부분 된 것입니다.
실제로 2022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발표한 초등 저학년 읽기 발달 연구에서도, 유아기에 충분한 그림책 상호작용 경험을 가진 아이들이 초등학교 이후 독해력 발달에서 더 안정적인 성장 곡선을 보였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출처: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제가 현장에서 체감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결과였습니다.
자연스러운 전환을 돕는 초기 줄글책 고르는 법
줄글책으로 넘어가는 시점을 잡았다면, 다음 문제는 어떤 책을 고르냐입니다. 여기서 많은 분들이 실수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아이 나이에 맞는 학습 도서를 먼저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의 역효과를 낳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처음 줄글책을 접하는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용의 수준보다 아이가 그 책을 스스로 펼치고 싶어 하느냐입니다. 텍스트 밀도(text density)가 갑자기 높아지면 아이는 책 자체를 부담으로 느낍니다. 텍스트 밀도란 한 페이지 안에서 그림 대비 글이 차지하는 비율을 말합니다. 초기 줄글책 단계에서는 이 밀도를 서서히 높여 가는 것이 핵심입니다.
초기 줄글책을 고를 때 제가 실제로 사용한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 아이가 이미 좋아하는 캐릭터나 소재가 담긴 책부터 시작할 것
- 한 챕터가 너무 길지 않고, 하루에 한 챕터씩 읽어도 성취감이 느껴지는 분량
- 그림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이야기의 흐름을 잡아 주는 삽화가 남아 있는 책
- 부모가 먼저 읽어도 부담스럽지 않아서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내용
이 기준으로 보면 고양이 해결사 깜냥 시리즈나 시공주니어 레벨원 시리즈, 좋은 책 어린이 저학년 문고 같은 책들이 현장에서 반응이 좋은 이유가 이해됩니다. 얇고, 친숙한 일상 소재를 다루고 있으며, 삽화가 충분히 남아 있어서 아이가 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그림으로 보완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읽기 독립(reading independence)의 개념입니다. 읽기 독립이란 아이가 스스로 책을 선택하고 혼자서 읽어 나가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독립이 너무 빠르게 강요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납니다. 한글을 뗐다고 해서 혼자 읽기를 곧장 기대하기보다, 부모가 소리 내어 읽어 주는 시간을 줄글책 단계에서도 충분히 유지하는 것이 이 독립을 오히려 빠르게 앞당기는 방법입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부모가 실감 나게 읽어 줄 때와 아이 혼자 눈으로만 읽을 때의 이해도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컸습니다.
한국어린이교육문화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초등 저학년 시기에 부모와 함께 소리 내어 읽는 공동 독서를 경험한 아이들은 혼자 묵독 훈련을 받은 아이들보다 어휘력과 독해력 향상 속도가 평균 1.3배 높았습니다(출처: 한국어린이교육문화연구원). 이 수치를 보고 저는 공동 읽기를 아이가 귀찮아할 때까지는 계속 이어 가야겠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결국 그림책에서 줄글책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책이 쌓아 준 이야기 감각이 줄글책을 읽어 나갈 수 있는 힘이 되고, 그 힘이 충분히 쌓였을 때 아이는 스스로 글 안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가 그림을 보던 눈이 글로 향하는 그 순간을 기다리며 책을 함께 펼치는 것,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utrPlRornVY&list=PLtDQxB_cXx8-54f9eerDGRqorp1eXV0tm&index=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