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가 "속상했어"라고 말하는 순간을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평소 감정 표현이 서툴렀던 유아가 역할놀이 중에 자연스럽게 감정을 꺼낸 것이었습니다. 그림책 한 권과 짧은 놀이가 만들어낸 변화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림책과 역할놀이를 결합한 정서교육이 왜 효과적인지, 제가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이야기와 함께 풀어보겠습니다.
그림책을 활용한 유아 정서능력함양, 그림책이 감정 언어를 여는 이유
그림책은 단순한 이야기책이 아닙니다. 유아가 등장인물의 감정을 관찰하고, 자신의 경험과 연결 짓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매개체입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그림책을 읽어 준 직후에 "이 친구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라고 물으면 유아들이 생각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답합니다. "무서운 것 같아요", "친구가 없어서 슬픈 것 같아요"처럼 그림 속 인물의 표정과 상황을 연결하며 정서어휘를 자연스럽게 쌓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서어휘란 자신이나 타인의 감정 상태를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 관련 단어의 목록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기쁘다, 슬프다, 무섭다, 억울하다"처럼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능력입니다. 유아기에 정서어휘가 풍부할수록 갈등 상황에서 폭력 대신 말로 해결하려는 시도가 늘어난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한국어린이집 총연합회가 발간한 보육 관련 자료에 따르면 유아기는 정서 발달의 결정적 시기로, 이 시기에 형성된 정서 인식 능력이 이후 또래 관계와 학업 적응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한국어린이집총연합회). 그림책이 이 시기에 특히 효과적인 이유는 유아가 안전한 거리에서 다양한 감정 상황을 간접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섭거나 슬픈 상황도 책 속에서는 부담 없이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역할놀이에서 감정이 살아 움직이는 순간
그림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그림책을 읽을 때 유아들은 감정을 '이해'하지만, 역할놀이를 할 때는 감정을 '경험'합니다.
친구와 다투는 장면이 담긴 그림책을 읽은 뒤 역할놀이로 확장했을 때의 일입니다. 처음에는 유아들이 책 속 대사를 그대로 따라 했습니다. 그런데 놀이가 진행될수록 "미안해", "같이 놀자"처럼 자신의 말로 상황을 이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책에는 없던 대사였습니다. 특히 평소 표현이 서툰 유아가 "혼자라서 슬펐어"라고 말하는 장면은 제가 직접 목격한 장면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핵심적으로 작동하는 개념이 바로 감정이입(empathy)입니다. 감정이입이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그 사람의 감정을 함께 느끼고 이해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단순히 "친구가 슬프겠다"라고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역할놀이를 통해 그 감정을 몸으로 겪어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친구 역할을 맡은 유아들이 상대방의 반응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배려하는 모습이 반복될수록, 놀이 밖 일상에서도 갈등을 대화로 풀려는 태도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교수-학습 단계로 보면 이 활동은 도입(그림책 감상 및 회상), 전개(정서 확인 및 역할놀이를 통한 정서 표현과 확장), 마무리(활동 정리)의 흐름으로 구성됩니다. 각 단계가 자연스럽게 이어질 때 유아들의 몰입도가 확실히 달라집니다. 몰입(flow)이란 활동에 완전히 빠져들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심리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역할놀이가 잘 이루어지는 날이면, 정리 시간을 알려도 유아들이 놀이를 끝내지 않으려는 모습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림책을 활용한 역할놀이 중심의 정서교육 프로그램을 설계할 때 핵심적으로 고려해야 할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그림책 선정: 유아가 공감하기 쉬운 또래 관계나 일상 감정 상황이 담긴 것
- 정서 확인 단계: 등장인물의 감정을 먼저 언어로 꺼내는 과정
- 역할놀이 진입: 대사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것에서 자신의 언어로 확장하도록 유도
- 교사의 사이드 코칭: 놀이 흐름을 끊지 않으면서 옆에서 조용히 지지해 주는 방식
교사의 역할이 결과를 바꾼다
프로그램이 아무리 잘 설계되어 있어도, 교사가 어떻게 개입하느냐에 따라 효과는 크게 달라집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봤을 때 가장 중요하게 느낀 것은 유아의 작은 감정 표현을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속상했구나", "그랬을 것 같아"처럼 짧게 공감해 주는 것만으로도 유아들은 자신의 감정이 수용받았다고 느끼고,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낯을 가리거나 표현이 서툰 유아에게는 사이드 코칭(side coaching) 방식이 효과적입니다. 사이드 코칭이란 교사가 역할놀이 진행 중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옆에서 조용히 힌트나 지지를 제공하는 기법으로, 놀이의 흐름을 살리면서도 유아가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방법입니다. 인형이나 소품을 활용하면 유아가 자신과 역할 사이에 심리적 거리를 두고 더 자유롭게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정서조절(emotion regulation) 역시 빠뜨릴 수 없는 요소입니다. 정서조절이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상황에 맞게 적절히 조율하는 능력으로, 충동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감정을 다스리는 힘을 말합니다. 역할놀이 중에 갈등 장면을 반복해서 연습하다 보면, 유아들은 실제 상황에서도 먼저 대화를 시도하는 패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는 프로그램이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실질적인 정서조절 훈련이 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교육부가 발표한 2019 개정 누리과정에서도 유아가 자신의 감정을 알고 상황에 맞게 표현하는 것을 사회관계 영역의 핵심 목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출처: 교육부). 이는 현장에서 정서교육이 선택이 아닌 필수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그림책과 역할놀이를 결합한 정서교육은 유아가 감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살아보는 경험을 제공합니다. 현장에서 이 방법을 직접 시도해 보신다면, 감정 표현이 서툰 유아들이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분명히 보게 되실 것입니다. 처음엔 작은 변화처럼 보이지만, 그 변화가 쌓이는 속도가 생각보다 훨씬 빠릅니다. 그림책 한 권부터 시작해 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dcollection.jnu.ac.kr/public_resource/pdf/000000047503_20260526115705.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