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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자세히 보기 (그림책의 구조, 물리적 특성, 책의 크기와 형태, 띠지)

by seulki87 2026. 4. 9.

솔직히 저는 그림책을 읽을 때 표지를 거의 그냥 넘겼습니다. 아이가 빨리 읽어 달라고 조르면 제목만 후다닥 읽고 첫 페이지로 넘어갔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먼저 표지를 붙잡고 "이 아이는 왜 혼자 바닷가에 있어?"라고 물어보는 걸 보고 제가 오히려 놀랐습니다. 표지 한 장에서 이미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던 겁니다.

 

 

그림책의 구조, 그림책에는 본문 밖에도 '이야기'가 있다

 

그림책은 일반 도서와 달리 페이지 수가 적습니다. 그래서 작가와 편집자는 본문 외의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 '본문 외의 공간'이라는 개념이 처음에는 낯설었는데, 직접 그림책을 뜯어보듯 살펴보고 나서야 그 의미가 와닿았습니다.

그림책의 구조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앞표지: 독자가 가장 먼저 접하는 겉표지로, 책의 분위기와 내용을 암시합니다.
  • 책등: 책을 꽂아 두었을 때 보이는 옆면으로, 제목과 작가명이 표기됩니다.
  • 면지(endpaper): 표지와 본문 사이를 연결하는 페이지로, 앞 면지와 뒷 면지로 나뉩니다.
  • 제목 페이지(title page): 책 본문이 시작되기 전, 제목과 작가 정보가 담긴 페이지입니다.
  • 헌정 페이지(dedication page): 작가가 특정인에게 책을 바치는 문구를 담은 페이지입니다.
  • 발행기록 페이지(copyright page): 출판 정보, 판권, 작가 소개 등이 기록된 페이지입니다.

여기서 면지란 단순히 표지와 본문을 물리적으로 잇는 종이가 아닙니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암시하는 일종의 '서막'이자 '에필로그' 역할을 합니다. 저도 면지를 그냥 빈 종이쯤으로 여기다가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다시 펼쳐봤는데, 그제야 앞 면지와 뒷 면지의 색이 달라져 있다는 걸 처음으로 눈치챘습니다.

 

물리적 특성, 이수지 그림책 3부작이 보여주는 물리적 구조의 힘

 

그림책의 물리적 특성을 가장 잘 활용한 사례로 이수지 작가의 그림책 3부작이 자주 언급됩니다. 이수지 작가는 책의 물리적 형태 자체를 이야기의 일부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파도야 놀자는 덧싸개(dust jacket)가 있는 그림책입니다. 여기서 덧싸개란 표지 바깥을 감싸는 별도의 종이 커버로, 겉표지를 보호하는 동시에 추가적인 그림 정보를 담기도 합니다. 이 그림책은 덧싸개를 벗기기 전과 후의 표지 그림이 다르고, 앞면지는 모래사장처럼 표현되어 있는 반면 뒷 면지는 파란 바다 색으로 조개껍데기와 불가사리가 가득합니다. 제가 직접 펼쳐보니 앞뒤 면지만 비교해도 아이가 바닷가에서 놀며 무언가를 얻었다는 인상을 자연스럽게 받게 됩니다.

또한 이 그림책은 접히는 부분, 즉 책의 노치(gutter)를 경계로 아이의 공간과 파도의 공간을 시각적으로 분리합니다. 여기서 노치란 책을 펼쳤을 때 좌우 페이지가 만나는 가운데 접힌 선을 의미하며, 이를 경계로 두 세계를 구분하는 연출은 텍스트 없이도 긴장감과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그림자 놀이는 책을 세워서 볼 때 더욱 실감이 나는 구조로 설계되었고, 거울 속으로는 면이 거울처럼 반사되는 효과를 활용합니다. 세 권 모두 판형(책의 크기와 형태)은 같지만 넘기는 방향이 각각 다릅니다. 판형이란 책의 가로·세로 크기와 비율을 가리키는 출판 용어로, 같은 판형에서 넘기는 방식을 달리하는 것만으로도 이야기의 리듬과 공간감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직접 비교해 보니 확실히 느껴졌습니다.

 

책의 크기와 형태도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그림책은 일반 도서에 비해 판형이 유난히 다양합니다. 서재 책꽂이에 그림책을 꽂으면 크기가 제각각이라 들쭉날쭉한 게 당연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작가와 편집자가 이야기의 내용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크기와 형태를 고심해서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줄줄이 꿴 호랑이는 호랑이들이 줄줄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표현하기 위해 가로로 긴 형태로 제작되었습니다. 펼치면 이야기가 옆으로 쭉 이어지는 구조인데, 제가 경험상 이런 형태는 아이들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다음엔 뭐가 나오지?" 하는 기대감을 훨씬 크게 만들어 줍니다. 반대로 모든 될 수 있어처럼 크기가 아주 작은 그림책은 아이가 한 손으로 쥐고 볼 수 있어서 친밀감과 집중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습니다. 영유아기 그림책이 작게 제작되는 이유가 단순히 "아이 손에 맞아서"가 아니라 그림의 집중도와 연결된다는 사실은 제가 직접 읽어주면서 체감한 부분입니다.

국내 그림책 연구에서도 그림책의 물리적 형태가 독자의 이해와 감정 반응에 영향을 준다는 점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한국어린이문학교육학회에 따르면 그림책의 구조적 요소는 단순한 미적 장치를 넘어 독자와 텍스트 사이의 상호작용을 촉진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고 설명합니다(출처: 한국어린이문학교육학회).

띠지 하나도 그냥 버리지 마세요

솔직히 저는 그동안 띠지를 책에 끼워두면 거추장스럽다고 바로 버려왔습니다. 그런데 뼈를 도둑맞았어요라는 그림책을 구입하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 그림책은 띠지와 겉싸개 디자인이 다르고, 겉싸개를 벗겨내면 제목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띠지를 벗기는 행동 자체가 이미 이야기의 첫 장면인 셈이었습니다.

여기서 띠지(book band)란 책의 중간이나 하단을 감싸는 종이 밴드로, 보통 책의 특징, 추천 문구, 수상 이력 등을 홍보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대부분의 서점이나 도서관에서는 보관 편의를 위해 띠지를 제거하고 보관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띠지 자체가 이야기 구성 요소로 설계된 그림책이라면, 띠지를 미리 버리면 작가가 의도한 첫 번째 독서 경험을 통째로 잃는 셈입니다.

공돌이 팬티처럼 띠지를 벗기는 행위가 아이의 그림책 읽기에 직접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이가 "팬티를 벗기고 읽어주세요"라는 안내 문구를 읽고 직접 띠지를 벗기면서 이야기에 몰입하는 효과는 어떤 유도 질문보다 강력합니다. 제 경험상 이런 장치 하나가 그림책에 대한 아이의 태도를 완전히 바꿔놓기도 합니다.

페이퍼 커팅(paper cutting) 기법을 활용한 그림책도 있습니다. 페이퍼 커팅이란 종이를 오려내어 층위를 만드는 기법으로, 2차원의 종이임에도 불구하고 3차원적인 입체감을 주는 효과를 냅니다. 이런 그림책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마치 버스 안을 직접 들여다보는 듯한 착각을 줍니다. 그림책이 인쇄된 종이의 물리적 속성을 창작 도구로 삼는다는 점에서, 디지털 콘텐츠로는 대체하기 어려운 고유한 경험을 제공합니다. 실제로 독서 연구에서도 종이책의 물성(物性)이 유아 독자의 감각 발달과 이야기 이해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가 보고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독서학회).

그동안 그림책을 읽으면서 이야기 내용에만 집중했던 게 조금 아쉽게 느껴집니다. 표지, 면지, 띠지, 덧싸개 하나하나에 작가와 편집자의 의도가 담겨 있다는 걸 알고 나면 그림책을 여는 순간부터 읽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오늘 집에 있는 그림책 한 권을 꺼내서 표지부터 앞면지, 뒷 면지까지 처음 보듯 다시 펼쳐보시길 권합니다. 아이와 함께라면 더욱 좋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v8SvROt0Qhk&t=7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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