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그림책 파라텍스트 탐색활동 (표지, 말이 적던 아이)

by seulki87 2026. 5. 25.

그림책을 읽어준다는 것

 

 

그림책을 읽어준다는 것,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첫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부터라고 생각하셨다면, 저도 한때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유아들과 책을 함께 보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이미 표지를 보는 순간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림책의 본문보다 표지와 면지, 제목 글자체에 더 열렬히 반응하는 만 3세 유아들을 보며, 저는 그동안 책 읽기의 절반을 흘려보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림책 파라텍스트 탐색활동, 표지 앞에서 멈추는 것이 왜 중요한가

 

파라텍스트(paratext)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파라텍스트란 본문 텍스트를 둘러싼 모든 주변 요소, 즉 표지, 면지, 속표지, 제목, 띠지, 판형, 타이포그래피 등을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문학이론가 제라르 주네트(Gérard Genette)가 정립한 개념으로, 그림책에서는 글과 그림이 만나기 전에 독자가 가장 먼저 마주치는 '문턱' 같은 공간입니다.

 

제가 유아들과 그림책을 읽을 때, 처음에는 표지를 간단히 보여주고 빠르게 본문으로 넘어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시간 여유가 생겨 표지 그림을 아이들과 천천히 들여다봤더니 반응이 전혀 달랐습니다. 한 유아는 표지 구석에 작게 그려진 달팽이를 발견하고 "이 달팽이가 주인공인 것 같아"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그 달팽이는 이야기 속 중요한 열쇠였고, 아이는 본문을 읽는 내내 자신이 예측한 것과 비교하며 눈을 반짝였습니다.

 

이 경험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것은 연구를 통해서도 확인됩니다. 만 3세 유아 15명을 대상으로 12주간 진행된 연구에서, 파라텍스트 탐색활동을 지속한 집단은 중기 이후 읽기 흥미도와 언어표현력 모두에서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향상을 보였습니다(출처: 이명화, 총신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17). 특히 사전-중기 구간에서는 변화가 크지 않다가, 중기-사후 구간에서 뚜렷한 상승이 나타났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는 파라텍스트 탐색이 단기간에 효과를 내는 활동이 아니라, 반복 경험이 쌓이면서 서서히 힘을 발휘하는 활동임을 보여줍니다. 저도 처음 몇 주는 아이들이 표지를 보며 "그냥 읽어요"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나자 아이들이 먼저 "면지 봐도 돼요?"라고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파라텍스트 탐색활동에서 다루는 요소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표지(앞표지, 뒤표지)와 덧싸개, 띠지 살펴보기
  • 면지(앞면지, 뒷면지)의 색과 그림 관찰하기
  • 속표지와 타이포그래피(글자체, 글자 크기, 배열) 탐색하기
  • 판형(책의 크기와 모양)이 주는 느낌 이야기하기
  • 읽기 전 예측한 내용과 읽기 후 실제 내용 비교하기

이 과정에서 유아들은 수동적인 청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의미 구성자가 됩니다. 면지란 책의 표지 안쪽과 본문 사이에 있는 페이지로, 단순한 여백처럼 보이지만 그림책에서는 이야기의 분위기를 암시하거나 복선을 담는 중요한 공간입니다. 저와 함께 책을 읽은 한 아이는 파란 면지를 보고 "바다 이야기일 것 같아요"라고 했는데, 실제로 그 책은 바다 마을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순간 아이의 표정은 자신의 예측이 맞았다는 뿌듯함으로 가득했습니다.

 

말이 적던 아이가 입을 열게 된 이유

 

언어표현력은 긴 문장을 말하는 능력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 것을 두려움 없이 꺼낼 수 있는 경험, 그게 쌓여야 진짜 표현력이 됩니다. 파라텍스트 탐색활동이 언어표현력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본 연구에서는 내용의 일치와 내용의 연계성 두 가지 하위 요소를 측정했습니다.

 

내용의 일치란 그림이나 이야기의 내용과 유아가 표현한 내용이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를 평가하는 기준입니다. 내용의 연계성이란 유아가 이야기를 서로 논리적으로 이어 붙여 표현하는 능력으로, 단순 나열이 아닌 이야기의 흐름을 구성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두 항목 모두 12주 활동 이후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향상을 보였습니다(출처: 총신대학교 교육대학원).

 

제가 직접 경험해보니, 이 변화가 어디서 오는지 느낌이 왔습니다. 파라텍스트 탐색은 정답이 없습니다. "이 표지 그림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라는 질문에 틀린 답은 없습니다. 평소 책 읽는 시간에 조용하던 아이들도 표지 앞에서는 작게라도 한 마디씩 했습니다. 그 한마디가 쌓이면서 점점 문장이 길어지고, 나중에는 "이건 아까 면지에서 봤던 그 색이랑 비슷해요"처럼 앞뒤를 연결하는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언어 발달 측면에서 만 3세는 어휘와 문법, 문장 체계가 급격히 성장하는 민감기에 해당합니다. 언어학자 촘스키(Chomsky)는 유아의 언어 표현력이 적절한 환경만 갖춰지면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고 보았는데, 파라텍스트 탐색은 바로 그 '환경'을 만들어주는 활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유아교육 현장에서 언어 발달을 지원하는 매체로 그림책이 가장 적합하다는 점도 이미 널리 인정받고 있습니다(출처: 한국어린이교육학회).

 

한 가지 짚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교사가 파라텍스트 탐색을 진행하면서 "이게 뭘 의미하는 것 같아?"라고 유도하다가 특정 답을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면, 이 활동의 장점이 절반쯤 사라집니다. 제 경험상 이건 꽤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유아가 엉뚱하게 보이는 말을 해도 일단 받아주고, 거기서 이야기를 넓혀가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다음에도 입을 열 수 있습니다.

 

그림책 읽기를 본문 텍스트 중심으로만 생각해오셨다면, 파라텍스트 탐색은 생각보다 훨씬 넓은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당장 내일 그림책을 꺼낼 때, 첫 페이지를 펼치기 전에 잠깐 멈춰보시길 권합니다. 표지를 아이와 함께 들여다보고, "이 책 어떤 이야기일 것 같아?"라고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시작이 됩니다. 짧은 그 한 마디가, 아이의 읽기 경험 전체를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참고: https://chongshin.dcollection.net/public_resource/pdf/000002381912_20260524171215.pdf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블로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