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글 없는 그림책을 수업에 꺼냈을 때, 유아들의 반응이 예상과 전혀 달랐습니다. "선생님, 글이 없어요"라고 당황하던 표정이 채 1분도 안 되어 "그럼 제가 이야기 만들어도 돼요?"로 바뀌는 순간, 저도 모르게 이게 바로 창의성 교육이구나 싶었습니다. 정해진 답이 없는 책 한 권이 교실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는 경험, 직접 겪어보니 논문 속 숫자가 왜 그렇게 나왔는지 실감이 됐습니다.

글 없는 그림책과 유아 창의성, 글 없는 그림책이란 무엇인가
글 없는 그림책(Wordless Picture Books)은 말 그대로 텍스트가 없거나 극히 일부만 포함된 그림책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인 그림책이 글과 그림이 함께 이야기를 전달한다면, 글 없는 그림책은 그림만으로 서사를 이끌어 갑니다. 그래서 독자는 단순히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 단서를 바탕으로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같은 책을 읽어도 아이마다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글 없는 그림책은 유아 창의성 교육에서 꾸준히 주목받고 있습니다. 글이 정답처럼 제시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은 그림 속 인물의 표정, 몸짓, 배경의 변화, 색채의 분위기, 사물의 위치 등을 스스로 해석하게 됩니다. 어떤 아이는 같은 장면을 보고 "주인공이 무서워서 도망가는 거예요"라고 말하고, 또 다른 아이는 "친구를 찾으러 가는 거예요"라고 이야기합니다. 정답이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아이의 상상력과 해석 능력이 자연스럽게 확장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확산적 사고(Divergent Thinking)입니다. 확산적 사고란 하나의 자극이나 문제에 대해 다양한 해결 방법과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능력을 말합니다. 창의성 연구에서는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내는 핵심 능력으로 설명되는데, 글 없는 그림책은 바로 이 확산적 사고를 자극하는 대표적인 매체입니다. 글이 있다면 독자는 작가가 제시한 이야기를 따라가게 되지만, 글이 없을 때는 스스로 빈칸을 채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실제로 유아들과 글 없는 그림책을 읽었을 때도 일반 그림책과는 다른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글이 있는 책을 읽을 때는 "다음엔 어떻게 돼요?"라는 질문이 많았다면, 글 없는 그림책에서는 "저는 이 사람이 화난 것 같아요", "아니에요, 슬픈 거예요", "여기 숨어 있는 것 같아요"처럼 서로 다른 해석이 끊임없이 나왔습니다. 특히 아이들이 그림 한 장을 오래 들여다보며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른의 입장에서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작은 그림 하나도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상상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제가 수업에서 활용했던 책들은 대부분 Caldecott상 수상작 가운데 선정했습니다. Caldecott상은 미국도서관협회(ALA)가 매년 가장 뛰어난 그림책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수여하는 상으로, 그림을 통한 이야기 전달력과 예술성을 높게 평가받은 작품들입니다. 실제로 수상작들을 살펴보면 글이 없어도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장면마다 독자의 상상을 유도하는 요소가 풍부하게 담겨 있습니다.
결국 글 없는 그림책의 가장 큰 매력은 아이가 수동적인 독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이야기 창작자가 된다는 점입니다. 책을 읽는 동시에 이야기를 만들고, 상상하고, 해석하는 경험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글 없는 그림책은 단순히 글자를 읽기 전 단계의 책이 아니라, 아이의 창의성과 사고력을 키워주는 특별한 그림책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통합활동으로 확장했을 때 달라지는 것들
글 없는 그림책 하나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지만, 저도 처음엔 거기서 멈췄습니다. 그런데 이야기 나누기 이후에 역할놀이, 신체표현, 조형 활동으로 연결했을 때 유아들의 반응이 확연히 달랐습니다. 머릿속에 있던 이야기를 몸으로, 손으로 꺼내는 과정에서 훨씬 구체적이고 독특한 아이디어들이 튀어나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통합활동(Integrated Activity)의 힘입니다. 통합활동이란 특정 교과 영역에 국한하지 않고 언어, 미술, 음악, 신체 등 여러 영역을 하나의 주제로 묶어 경험하게 하는 교수 방법입니다. 유아기에는 각 발달 영역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방식이 전인적 발달에 특히 효과적입니다.
실제로 서울 소재 유치원 만 5세 유아 35명을 대상으로 4주간 진행된 연구에서, 글 없는 그림책 기반 통합활동을 경험한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창의적 능력 전체 점수에서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높은 결과를 보였습니다(t=6.85, p <. 001). 이 차이가 단순 그림책 감상과 통합활동 연계 사이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제 경험상 특히 조형 활동 단계에서 변화가 두드러졌습니다. 평소 "어떻게 그려야 해요?"라고 묻던 유아가, 자기가 상상한 이야기를 그린다는 전제가 생기자 아무도 묻지 않고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정답을 찾으려던 태도가 표현하려는 태도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창의성의 어떤 요소가 실제로 달라졌나
연구에서 사용된 검사 도구는 유아용 통합 창의성 검사(K-ICT)입니다. K-ICT란 언어 창의성과 도형 창의성, 그리고 창의적 성격을 함께 측정할 수 있도록 설계된 유아 전용 창의성 검사 도구입니다. 유아의 언어적 반응과 도형 완성 과제, 교사 관찰 평정을 함께 활용한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결과를 보면, 모든 요소가 고르게 향상된 건 아니었습니다. 언어 창의성 중에서는 상상력, 융통성, 독창성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났지만, 유창성(반응의 양)에서는 차이가 없었습니다. 도형 창의성에서는 새로운 요소 첨가, 주제, 비관습성이 향상됐고, 완성도나 연속성에서는 차이가 없었습니다. 창의적 성격에서는 과제 집착력만 유의미하게 달라졌습니다.
이 패턴이 흥미롭습니다. 글 없는 그림책 활동이 키운 건 얼마나 많이 말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남다르게 생각하느냐였던 셈입니다. 통합활동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핵심 요소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상상력: 그림 속 단서를 바탕으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장면을 스스로 구성하는 과정에서 향상
- 융통성: 같은 그림을 보고도 서로 다른 범주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다양한 시각 습득
- 독창성: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더 색다른 해석을 시도하는 경험 누적
- 과제 집착력: 자기가 만든 이야기를 끝까지 표현하고 싶은 동기 형성
유아기 창의성 발달은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의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결정적 시기란 특정 발달 영역이 외부 자극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간적 구간을 의미하는데, 창의성은 바로 이 유아기에 교육적 개입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한국교육개발원).
교사의 역할이 결과를 가른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글 없는 그림책 자체의 힘도 크지만, 교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유아의 표현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걸 몸으로 느꼈습니다. 제가 "그거 맞아, 잘 봤어"를 자꾸 말했을 때와, "왜 그렇게 생각했어?"를 물었을 때 유아들의 후속 발언 깊이가 달랐습니다.
이것은 발산적 발문(Divergent Questioning)의 효과입니다. 발산적 발문이란 정답이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열린 질문 방식으로, 유아의 사고를 여러 방향으로 확장시키는 교수 전략입니다. "어떻게 생각해?", "다른 방법은 없을까?", "네가 주인공이라면?" 같은 질문이 이에 해당합니다.
반대로 교사가 무의식중에 특정 해석을 유도하거나 "일반적인 답"을 내비치면, 유아들은 빠르게 그쪽으로 수렴합니다. 제 경험상 이건 생각보다 훨씬 자주 일어납니다. 글 없는 그림책의 가장 큰 장점인 열린 해석 가능성이 교사의 반응 하나로 닫혀버릴 수 있다는 점, 수업 준비할 때 가장 신경 쓰게 됩니다.
누리과정에서도 유아 중심, 놀이 중심 교육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글 없는 그림책을 활용한 통합활동은 유아가 스스로 의미를 구성하는 적극적인 학습자로 서도록 돕는 방법으로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습니다(출처: 교육부).
이 모든 경험을 돌아보면, 글 없는 그림책은 단순히 흥미로운 수업 도구가 아니라 유아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과정 자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장 뭔가를 가르치려 하기보다, 유아가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고 표현하고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을 넓혀가는 그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것, 그게 핵심인 것 같습니다. 글 없는 그림책을 아직 수업에 써보지 않으셨다면, 부담 없이 한 권부터 꺼내보시길 권합니다. 처음 펼치는 유아의 표정부터 이미 다릅니다.
참고: https://oasis.dcollection.net/public_resource/pdf/000001890912_20260603201139.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