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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없는 그림책 (워드리스북, 그림 서사, 칼데콧상, 이지현 작가)

by seulki87 2026. 4. 13.

글이 없는데 아이들이 더 열심히 읽는 책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그게 잘 믿기지 않았습니다. 유치원에서 그림책을 읽어줄 때 글 없는 그림책을 꺼내 들었더니 아이들이 오히려 눈을 더 크게 뜨고 그림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글이 없으면 내용 전달이 어렵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워드리스북이란 무엇인가

 

워드리스북(Wordless Book)이란 텍스트 없이 그림만으로 서사를 전달하는 그림책 형식을 말합니다. 여기서 워드리스북이란 단순히 글이 빠진 책이 아니라, 그림 자체가 언어를 대신하는 독립적인 서사 구조물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림책은 글과 그림이 함께 이야기를 끌어간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림책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림 단독으로 서사를 완성하려는 시도는 꽤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1730년대에 영국의 판화 작가 윌리엄 호가스가 순서대로 읽으면 이야기가 전개되는 연속 그림을 제작했는데, 이 작품이 너무 인기를 끌어 당시 최초로 저작권 논의가 시작됐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그림으로만 담아도 사람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감동받는다는 증거였습니다.

1932년, 편집자 루스 캐럴이 어린이를 위한 최초의 글 없는 그림책을 출판했습니다. 강아지가 토끼 굴에서 식사하고 게임을 하는 내용이었는데, 처음에는 흑백으로 출판됐다가 1967년에 새로 개정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을 기점으로 글 없는 그림책의 역사가 시작됐지만, 그 사이 독자들은 여전히 글이 있는 쪽을 선호했고 워드리스북은 한동안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그림 서사가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

 

그림 서사(Visual Narrative)란 텍스트 없이 이미지의 배열과 구성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그림 서사란 단순히 그림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장면과 장면 사이의 공백을 독자가 채우도록 설계된 구조입니다.

책을 선택하는 작가의 결정 중 가장 급진적인 것이 "글을 쓰지 않겠다"는 결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림책 연구자 데이비드 앨리스는 작가가 텍스트를 제거하는 행위는 독자를 의미의 공동 창작자로 초대하는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독자는 저마다의 삶과 경험을 바탕으로 그림을 읽기 때문에, 같은 책이 독자 손에 넘어갈 때마다 조금씩 다른 이야기로 변형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유치원에서 직접 경험해봤는데, 이게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그대로였습니다. "이 친구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라고 물으면 아이마다 전혀 다른 대답이 나왔습니다. 한 아이는 "무서워서 숨는 것 같아요"라고 했고, 다른 아이는 "엄마 찾는 것 같아요"라고 했습니다. 같은 그림 한 장에서 이렇게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는 게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창작자 입장에서도 그림 서사는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닙니다. 텍스트 블록 없이 화면을 구성할 수 있다는 자유가 생기지만, 서사의 흐름을 글 없이 그림만으로 이끌어야 하기 때문에 장면 분할, 시점 전환, 속도 조절 같은 시각적 판단이 훨씬 정밀해야 합니다. 한 장으로 처리할지, 펼친 면 전체를 쓸지, 컷 분할을 할지에 따라 독자가 느끼는 속도와 감정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칼데콧상과 글 없는 그림책의 전환점

 

칼데콧상(Caldecott Medal)이란 미국에서 매년 뛰어난 그림책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수여되는 상으로, 그림책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칼데콧상이란 단순한 예술상이 아니라, 수상작이 곧 그 해 그림책 시장의 방향을 이끄는 기준이 됩니다.

1978년, 피터 스파이어의 '노아의 방주'가 글 없는 그림책 최초로 칼데콧상을 수상하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글 없는 그림책이 주류 그림책 시장에서 본격적으로 인정받게 됐고, '이상한 화요일', '시간 상자',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소녀'(원제: All in a Day) 같은 작품들이 칼데콧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J. B. 스틱스라는 작가는 칼데콧 명예상을 5번이나 글 없는 그림책으로만 수상하며 이 분야의 전문 작가로 자리 잡기도 했습니다.

1963년 모리스 센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 역시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이 책은 전체가 글 없는 그림책은 아니었지만, 중간에 글 없는 페이지를 여러 장 배치하면서 독자들이 "글이 없어도 이 장면이 이렇게 강렬하구나"를 경험하게 만들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방식, 즉 전체가 아니라 일부만 글 없는 페이지로 구성하는 전략이 독자를 워드리스북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 데 가장 효과적인 것 같습니다.

글 없는 그림책이 아이들의 언어 발달과 이야기 구성 능력에 미치는 영향은 여러 연구에서도 확인됩니다. 그림책 읽기 활동이 아동의 서사 능력과 언어 표현력을 향상한다는 점은 국내외 연구에서 꾸준히 보고되고 있습니다(출처: 한국어린이문학교육학회). 단순히 재미있는 경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읽고 이야기를 구성하는 과정 자체가 언어 학습의 핵심 활동이 된다는 것입니다.

글 없는 그림책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핵심 역량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그림 속 인물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감정을 읽는 능력
  • 장면과 장면 사이의 공백을 연결해 서사를 구성하는 능력
  • 자신의 경험과 그림을 연결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능력

 

이지현 작가의 그림책이 보여주는 것

 

이지현 작가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되, 그 위에 뽀얀 빛이 내려앉는 듯한 환상적인 화풍으로 작업하는 작가입니다. 데뷔작 '수영장'을 시작으로 최근작 '마지막 섬'까지, 작품 수가 많지 않음에도 독자의 기억에 강하게 남는 그림책을 만들어왔습니다.

작가는 스스로 노랑 고양이, 봄날의 골목길, 힘차게 날아가는 오리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어찌 보면 사소하게 지나칠 수 있는 장면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소함이 이지현 작가 그림책의 본질입니다. 화려하거나 극적인 사건 없이도, 일상의 작은 순간들이 그림 안에서 소중하고 가치 있게 빛납니다.

일러스트레이션(Illustration)이란 텍스트를 보조하는 그림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립적인 의미를 생성하는 시각 언어입니다. 여기서 일러스트레이션이란 단순한 삽화가 아니라, 독자와 작가가 대화하는 채널 그 자체입니다. 이지현 작가의 그림에서는 그 채널이 특히 섬세하게 열려 있습니다. 빛의 방향, 여백의 크기, 인물의 위치만으로도 감정이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북아트(Book Art)라는 개념도 이 맥락에서 중요합니다. 북아트란 책의 판형, 재질, 종이의 질감, 표지 디자인까지 모두 이야기의 일부로 기능하도록 설계된 책 제작 방식입니다. 글 없는 그림책에서는 특히 이 북아트적 요소들이 서사를 보조하는 핵심 도구가 됩니다. 이지현 작가의 작품에서도 책을 펼쳤을 때 느껴지는 공기감, 색감의 온도 같은 요소들이 이야기를 완성하는 데 함께 작동합니다(출처: 한국그림책학회).

 

제가 직접 아이들과 이런 그림책을 읽어보면서 느낀 건, 교사가 먼저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 것이 핵심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이건 슬픈 장면이야"라고 먼저 말해버리면 아이들은 그 틀 안에서만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반면 "어떤 것 같아?"라고 열어두면, 아이들이 그림 안에 없는 것까지 끌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글 없는 그림책은 30년대에 처음 등장해 60년대에 재조명받고, 지금 다시 주목받고 있는 형식입니다. 이지현 작가가 그 흐름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단순히 특이한 화풍 때문이 아닙니다. 그림 하나로 독자를 이야기의 공동 저자로 만들어내는 능력 때문입니다.

 

글이 없는 책을 아이에게 읽어주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분들께, 저는 오히려 반대로 경험해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먼저 읽어줄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아이 옆에 앉아서 같이 그림을 보고 "이 친구 지금 어디 가는 걸까?"라고 한마디만 해도 충분합니다. 그다음부터는 아이가 이야기를 만들어갑니다. 그 순간이 생각보다 훨씬 풍성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hkrXIFlqC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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