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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없는 그림책 (워드리스북, 그림 서사, 칼데콧상, 이지현 작가)

by seulki87 2026. 4. 13.

글이 없는데 아이들이 더 열심히 읽는 책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그게 잘 믿기지 않았습니다. 유치원에서 그림책을 읽어줄 때 글 없는 그림책을 꺼내 들었더니 아이들이 오히려 눈을 더 크게 뜨고 그림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글이 없으면 내용 전달이 어렵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글 없는 그림책, 워드리스북이란 무엇인가

처음 글 없는 그림책을 아이들과 함께 펼쳤을 때,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읽어줄 문장이 없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낯설었기 때문입니다. 평소처럼 책을 읽어주려다가 멈칫하게 되었고, 잠시 침묵이 흐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아이들이 먼저 그림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친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여기서 넘어졌나 봐요” 같은 말들이 이어졌고, 저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이 책은 ‘읽어주는 책’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는 책’이라는 것을요.

 

워드리스북(Wordless Book)은 말 그대로 글이 없는 그림책이지만, 단순히 텍스트가 빠진 형태가 아닙니다. 그림 자체가 이야기를 이끄는 중심 언어가 되어, 독자가 장면과 장면을 연결하며 서사를 완성해 나가도록 설계된 책입니다. 실제로 아이들은 글이 없어도 인물의 표정, 몸짓, 색감의 변화만으로 상황과 감정을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읽어냅니다. 저는 교실에서 아이들이 한 장면을 두고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는 모습을 보며, 이 책이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다양한 이야기를 허용하는 구조라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최근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흐름이기도 합니다. William Hogarth의 연속 판화처럼 그림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시도는 이미 18세기부터 존재했습니다. 이후 1930년대에는 어린이를 위한 글 없는 그림책도 출판되었지만, 한동안은 글이 있는 책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현장에서 느끼는 것은 분명합니다. 워드리스북은 아이가 ‘읽는 사람’에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으로 바뀌는 순간을 만들어 줍니다. 글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이 말하게 되고, 더 깊이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글 없는 그림책을 단순히 특별한 형식의 책이 아니라, 아이의 사고와 표현을 끌어내는 하나의 강력한 도구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림 서사가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

글 없는 그림책을 아이들과 함께 읽다 보면, 가장 놀라운 순간은 ‘정답이 하나가 아닐 때’입니다. 한 장면을 보여주며 “이 친구 지금 어떤 기분일까?”라고 물었을 때였습니다. 같은 그림을 보고도 한 아이는 “무서워서 숨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고, 다른 아이는 “엄마 찾는 것 같아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그때 조금 당황했습니다. 같은 장면을 보고 이렇게 다른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림책 속 그림은 하나지만,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는 아이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 차이는 틀린 것이 아니라, 각자가 가진 경험과 감정에서 비롯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림 서사(Visual Narrative)는 단순히 그림을 나열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장면과 장면 사이의 ‘빈 공간’을 독자가 스스로 이어 붙이며 이야기를 완성하도록 만드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글이 없는 그림책에서는 독자가 수동적으로 내용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그림책 연구자 David Lewis가 말했듯이, 작가가 글을 쓰지 않기로 결정하는 순간 독자는 이야기의 공동 창작자가 됩니다. 실제로 교실에서 아이들과 읽어보면, 한 권의 책이 아이 수만큼의 이야기로 확장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과정은 창작자에게도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닙니다. 글 없이 이야기를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장면을 어디에서 끊을지, 한 페이지에 담을지 아니면 펼친 면 전체를 사용할지, 시점을 어떻게 이동시킬지에 따라 독자의 감정과 읽기 속도가 크게 달라집니다. 제가 아이들과 함께 책을 보며 느낀 것은, 이 작은 차이 하나가 “빠르게 넘기는 책”이 될지, “오래 머무르는 책”이 될지를 결정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저는 글 없는 그림책을 볼 때, 단순히 그림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은 독자에게 어떤 참여를 요구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림 서사는 읽는 사람을 관찰자가 아니라 ‘이야기를 완성하는 사람’으로 초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칼데콧상과 글 없는 그림책의 전환점

칼데콧상(Caldecott Medal)이란 미국에서 매년 뛰어난 그림책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수여되는 상으로, 그림책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칼데콧상이란 단순한 예술상이 아니라, 수상작이 곧 그 해 그림책 시장의 방향을 이끄는 기준이 됩니다.

 

1978년, 피터 스파이어의 '노아의 방주'가 글 없는 그림책 최초로 칼데콧상을 수상하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글 없는 그림책이 주류 그림책 시장에서 본격적으로 인정받게 됐고, '이상한 화요일', '시간 상자',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소녀'(원제: All in a Day) 같은 작품들이 칼데콧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J. B. 스틱스라는 작가는 칼데콧 명예상을 5번이나 글 없는 그림책으로만 수상하며 이 분야의 전문 작가로 자리 잡기도 했습니다.

 

1963년 모리스 센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 역시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이 책은 전체가 글 없는 그림책은 아니었지만, 중간에 글 없는 페이지를 여러 장 배치하면서 독자들이 "글이 없어도 이 장면이 이렇게 강렬하구나"를 경험하게 만들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방식, 즉 전체가 아니라 일부만 글 없는 페이지로 구성하는 전략이 독자를 워드리스북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 데 가장 효과적인 것 같습니다.

 

글 없는 그림책이 아이들의 언어 발달과 이야기 구성 능력에 미치는 영향은 여러 연구에서도 확인됩니다. 그림책 읽기 활동이 아동의 서사 능력과 언어 표현력을 향상한다는 점은 국내외 연구에서 꾸준히 보고되고 있습니다(출처: 한국어린이문학교육학회). 단순히 재미있는 경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읽고 이야기를 구성하는 과정 자체가 언어 학습의 핵심 활동이 된다는 것입니다.

글 없는 그림책이 독자에게 요구하는 핵심 역량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그림 속 인물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감정을 읽는 능력
  • 장면과 장면 사이의 공백을 연결해 서사를 구성하는 능력
  • 자신의 경험과 그림을 연결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능력

이지현 작가의 그림책이 보여주는 것

이지현 작가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되, 그 위에 뽀얀 빛이 내려앉는 듯한 환상적인 화풍으로 작업하는 작가입니다. 데뷔작 '수영장'을 시작으로 최근작 '마지막 섬'까지, 작품 수가 많지 않음에도 독자의 기억에 강하게 남는 그림책을 만들어왔습니다.

작가는 스스로 노랑 고양이, 봄날의 골목길, 힘차게 날아가는 오리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어찌 보면 사소하게 지나칠 수 있는 장면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소함이 이지현 작가 그림책의 본질입니다. 화려하거나 극적인 사건 없이도, 일상의 작은 순간들이 그림 안에서 소중하고 가치 있게 빛납니다.

 

일러스트레이션(Illustration)이란 텍스트를 보조하는 그림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립적인 의미를 생성하는 시각 언어입니다. 여기서 일러스트레이션이란 단순한 삽화가 아니라, 독자와 작가가 대화하는 채널 그 자체입니다. 이지현 작가의 그림에서는 그 채널이 특히 섬세하게 열려 있습니다. 빛의 방향, 여백의 크기, 인물의 위치만으로도 감정이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북아트(Book Art)라는 개념도 이 맥락에서 중요합니다. 북아트란 책의 판형, 재질, 종이의 질감, 표지 디자인까지 모두 이야기의 일부로 기능하도록 설계된 책 제작 방식입니다. 글 없는 그림책에서는 특히 이 북아트적 요소들이 서사를 보조하는 핵심 도구가 됩니다. 이지현 작가의 작품에서도 책을 펼쳤을 때 느껴지는 공기감, 색감의 온도 같은 요소들이 이야기를 완성하는 데 함께 작동합니다(출처: 한국그림책학회).

 

제가 직접 아이들과 이런 그림책을 읽어보면서 느낀 건, 교사가 먼저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 것이 핵심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이건 슬픈 장면이야"라고 먼저 말해버리면 아이들은 그 틀 안에서만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반면 "어떤 것 같아?"라고 열어두면, 아이들이 그림 안에 없는 것까지 끌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글 없는 그림책은 30년대에 처음 등장해 60년대에 재조명받고, 지금 다시 주목받고 있는 형식입니다. 이지현 작가가 그 흐름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단순히 특이한 화풍 때문이 아닙니다. 그림 하나로 독자를 이야기의 공동 저자로 만들어내는 능력 때문입니다.

 

글이 없는 책을 아이에게 읽어주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분들께, 저는 오히려 반대로 경험해 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먼저 읽어줄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아이 옆에 앉아서 같이 그림을 보고 "이 친구 지금 어디 가는 걸까?"라고 한마디만 해도 충분합니다. 그다음부터는 아이가 이야기를 만들어갑니다. 그 순간이 생각보다 훨씬 풍성합니다.

 

아이들과 글 없는 그림책을 함께 보다 보면, 어른이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끝없이 흘러나오는 순간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딸 역시 글 없는 책을 볼 때는 정답을 찾으려 하기보다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자연스럽게 꺼내 놓곤 하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아이의 마음속 세계를 조금 더 가까이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글 없는 그림책이 아이의 상상력만 키워주는 책이 아니라, 아이의 언어와 생각을 가장 솔직하게 만나게 해주는 특별한 매개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hkrXIFlqC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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