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한 권으로 아이들과 양성평등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처음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솔직히 저도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을 교실에서 직접 꺼내 들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 그림책은 단순히 집안일 분담을 다루는 이야기가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돼지책 그림책 놀이, 페리텍스트가 먼저 말을 건다
그림책을 수업에 활용할 때 많은 분들이 본문 내용에 집중하는데, 저는 『돼지책』에서 페리텍스트(peritext)의 힘을 먼저 느꼈습니다. 페리텍스트란 표지, 면지, 헌사 등 본문 바깥을 둘러싼 텍스트 요소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책의 '껍데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작가의 의도가 가장 먼저 담기는 공간입니다.
표지만 봐도 이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엄마로 보이는 여성이 아빠와 두 아들을 등에 업고 있는데, 셋은 한껏 웃고 있는 반면 엄마는 무표정입니다. 제가 직접 아이들과 이 표지를 들여다봤을 때, 한 아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엄마 표정이 없어요." 울거나 찡그리는 것도 아닌, 그 무감각한 표정이 오히려 더 강하게 다가왔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저도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비슷하게 느꼈습니다. 이미 힘들다는 표현조차 사라진 상태, 그게 더 짠하게 다가온다는 게 아이들도 직관적으로 읽어냈습니다.
분홍빛 면지 역시 그냥 넘어가면 아깝습니다. 아이들에게 "이 색이 뭘 닮았을까?" 물어보면 "돼지요!"라는 대답이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그 순간부터 아이들은 이미 책의 주제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헌사에 적힌 "줄리아에게"라는 문구도 흥미롭습니다. 처음에는 가족에게 바치는 헌사인가 싶었는데, 이는 앤서니 브라운의 초기 편집자이자 멘토인 줄리아 매크레이를 가리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관계가 없었다면 지금의 앤서니 브라운이 없었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창작자에게 편집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본문 텍스트에서도 눈여겨볼 장치가 있습니다. 아빠 이름은 '피곳 씨', 아들들은 '사이먼'과 '패트릭'으로 불리는데 엄마는 그냥 '피곳 씨의 아내'입니다. 그리고 집, 정원, 차고, 차 앞에는 모두 '멋진'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이 반복적인 언어 배치가 의도적이라는 걸 아이들과 함께 짚어보면 비판적 리터러시(critical literacy) 훈련으로 이어집니다. 비판적 리터러시란 텍스트를 표면적으로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언어가 어떤 권력관계를 반영하는지 읽어내는 능력을 말합니다.
『돼지책』에서 돼지 이미지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살펴보면 앤서니 브라운의 숨바꼭질 같은 그림 기법이 돋보입니다.
- 아빠의 그림자가 돼지 실루엣으로 바뀌는 장면
- 벽지, 액자, 브로치, 심지어 필통 속 펜까지 돼지 모양으로 변해가는 과정
- 엄마가 떠난 뒤 바닥을 뒹굴며 음식을 찾는 가족의 모습
이 시각적 변화가 누적될수록 아이들은 "돼지처럼 행동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비판적 사고와 역할 분담 놀이로 연결하기
저는 이 책을 교실에서 활용할 때 단순히 읽어주는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가장 반응이 좋았던 건 "만약 내가 엄마와 하루를 바꿔 산다면?"이라는 상황 설정 토론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처음에는 "청소 싫어요"라고 웃으며 말하다가, 조금 지나면 "그럼 엄마는 매일 이걸 혼자 하는 거잖아요"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순간이 수업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입니다.
역할극(role-play)을 통한 공감 훈련도 효과적이었습니다. 역할극이란 특정 인물의 입장이 되어 행동하고 말해보는 체험 활동으로, 타인의 감정과 상황을 몸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교육 기법입니다. 아이들에게 교실 안에서 할 수 있는 집안일, 즉 장난감 정리, 책상 닦기, 교구 제자리 두기 등을 나눠 맡게 했더니 처음에는 서로 쉬운 것만 하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한 번 역할을 바꿔보고 나서는 "이게 생각보다 많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미술 활동으로 돼지 얼굴을 만들며 "이 돼지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를 이야기하게 했을 때도 예상 밖의 반응이 있었습니다. 한 아이가 "돼지가 된 아빠는 창피할 것 같아요"라고 말했는데, 저는 그 문장이 이 수업 전체를 정리해준다고 느꼈습니다.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엄마가 자동차를 수리하는 모습은 처음 보면 뜬금없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솔직히 이건 저도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동차 번호판에 "1 2 3"이 적혀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작심삼일이라도 좋으니 시도해 보라는 여지를 남긴 건지, 아니면 세 명을 가리키는 건지 독자마다 다르게 읽힐 수 있는 열린 결말입니다. 이처럼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은 독자가 완성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림책 텍스트 분석(picture book analysis) 수업 자료로도 자주 활용됩니다. 그림책 텍스트 분석이란 그림과 글이 함께 만들어내는 의미를 다층적으로 해석하는 접근 방식입니다.
실제로 그림책을 교육 현장에서 활용하는 방식에 대해 한국어린이문학교육학회는 그림책이 단순한 이야기 매체를 넘어 유아의 사회·정서 발달을 돕는 핵심 교육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꾸준히 강조해왔습니다(출처: 한국어린이문학교육학회). 또한 교육부의 2019 개정 누리과정에서는 유아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적 관계를 이해하고 협력하는 태도를 기르는 것을 핵심 목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출처: 교육부 누리과정 포털).
『돼지책』을 활용한 수업이 의미 있는 건, 아이들이 책 내용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왜?"라고 되묻는 경험을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유아에게 양성평등 주제가 너무 무겁지 않냐고 하시는데,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오히려 이 나이에 가족 안에서의 역할을 구체적인 이야기로 접해봐야 나중에도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돼지책』을 아직 교실에서 꺼내지 않았다면, 표지부터 함께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시작해 보시길 권합니다. 아이들이 먼저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그 질문이 바로 수업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