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랫동안 그림책 읽기는 교사가 읽어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두 아이가 나란히 앉아 그림책을 함께 보며 "이 친구는 왜 울어?"라고 묻고 대답하는 장면을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또래 간 그림책 읽기 활동이 유아의 이야기 이해력과 읽기 태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제 경험과 연구 결과를 함께 풀어보겠습니다.

또래 간 그림책 읽기 활동, 교사가 읽어줘야 제일 좋다는 믿음이 정말 맞을까?
유아교육 현장에서 그림책 읽기는 대부분 교사가 주도합니다. 교사가 앞에 서서 읽어주고, 유아들은 둘러앉아 듣는 형태가 가장 익숙한 방식입니다. 실제로 성인이 그림책을 읽어주는 활동은 어휘력과 문해력 발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꾸준히 보고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교실에서 아이들을 관찰하며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과연 아이들은 교사 앞에서만 가장 활발하게 생각하고 이야기할까요?
제가 직접 경험한 바로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교사 주도 읽기에서는 아이들이 질문을 받아야 대답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손을 들고 발표하는 몇몇 아이를 중심으로 대화가 이루어지고, 다른 아이들은 조용히 듣는 역할에 머무르는 모습도 자주 보였습니다. 물론 집중해서 듣는 것도 중요한 경험이지만, 모든 아이가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반면 또래 간 그림책 읽기 활동은 분위기 자체가 달랐습니다. 같은 연령의 친구와 나란히 앉아 책을 보면서 아이들은 훨씬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얘는 지금 화난 것 같아", "나는 이렇게 했을 것 같은데?"와 같은 말들이 자연스럽게 오갔고, 책 내용에서 벗어나 자신의 경험을 연결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사회적 구성주의(Social Constructivism)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구성주의란 지식이 혼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구성된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즉, 또래와의 대화 과정 자체가 학습의 중요한 과정이라는 의미입니다.
또래 간 그림책 읽기 활동은 흔히 말하는 짝 읽기(Paired Reading)와도 차이가 있습니다. 짝 읽기는 읽기 능력이 높은 아이가 낮은 아이를 돕는 구조인 반면, 또래 간 그림책 읽기는 서로 대등한 위치에서 의견을 주고받으며 함께 의미를 만들어 간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정답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는 만큼 아이들은 상대방의 생각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거나 확장하며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실제로 관련 연구에서도 또래 간 그림책 읽기에 참여한 유아들이 교사 중심 활동보다 더 많은 언어적 상호작용을 보였으며, 이야기 이해와 표현 능력에서도 긍정적인 변화를 나타낸 것으로 보고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이들이 책을 '배우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이야기하는 소재'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교사가 설명해 주는 이야기보다 친구와 나누는 한마디가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분명 존재했습니다.
이야기 이해력, 단순 기억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야기 이해력(story comprehension)이라고 하면 흔히 "줄거리를 잘 기억하는가"를 떠올리는 분들이 있는데, 저는 그보다 훨씬 복잡한 능력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실제로 이야기 이해력은 세 가지 층위로 나뉩니다.
- 문자적 이해(literal comprehension): 이야기에 명시된 사실을 기억하고 줄거리를 파악하는 능력입니다. 쉽게 말해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를 떠올리는 수준입니다.
- 추론적 이해(inferential comprehension): 등장인물의 감정과 사건의 인과관계를 추론하고, 자신의 경험과 연결 짓는 능력입니다. 텍스트에 직접 나와 있지 않은 내용을 읽어내는 것이죠.
- 평가적 이해(critical comprehension): 등장인물의 감정을 조망하고, 문제 해결 방식을 비평하거나,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능력입니다. 여기서 평가적 이해란 단순히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독자로서 주체적으로 의미를 만드는 능력을 뜻합니다.
만 5세 유아 36명을 대상으로 5주 동안 진행된 연구에서, 또래 간 그림책 읽기 활동을 진행한 집단은 개별적으로 책을 읽은 집단에 비해 세 영역 모두에서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향상을 보였습니다. 전체 이야기 이해력(t=4.00, p<.001), 문자적 이해(t=3.74, p <. 001), 추론적 이해(t=2.67, p <. 05), 평가적 이해(t=2.19, p <. 05) 모두 실험집단이 비교집단보다 높게 나왔습니다.
제가 직접 관찰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처음에는 그림만 짧게 훑던 아이들이 친구가 "근데 이 친구 왜 저렇게 됐어?"라고 물으니까, 잠시 고민하다가 "아까 여기서 그랬잖아"라며 책을 다시 넘기는 거였습니다. 그 순간이 바로 추론적 이해가 일어나는 장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교사가 유도하지 않아도, 친구의 질문 하나가 사고를 깊게 만든 셈이죠.
또래 상호작용이 읽기태도를 바꾼다는 증거
읽기 태도는 단순히 책을 얼마나 잘 읽느냐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여기서 읽기 태도(reading attitude)란 책 읽기에 대해 느끼는 긍정적·부정적 감정과 독서에 참여하려는 의지, 그리고 스스로 책을 찾고 읽으려는 행동 경향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책을 잘 읽는 아이"가 아니라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와 더 관련된 개념입니다.
유아교육 현장에서는 읽기 능력만큼 읽기태도를 중요하게 봅니다. 아무리 글자를 빨리 읽어도 책 읽기를 즐겁지 않은 과제로 받아들이면 독서 경험이 오래 지속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읽기 태도가 긍정적으로 형성된 아이들은 책을 놀이처럼 받아들이며 자연스럽게 독서 경험을 확장해 나갑니다.
유아기의 문해 경험과 읽기태도 형성의 관계를 다룬 연구들에서도, 어린 시절의 긍정적인 독서 경험은 이후 독서 습관과 학업 성취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독서를 의무가 아닌 즐거운 활동으로 인식하는 경험 자체가 중요한 교육적 자산이 되는 것입니다.
또래 간 그림책 읽기 활동이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같은 연구에서는 읽기 태도 점수 역시 또래 간 그림책 읽기 활동에 참여한 유아들이 비교집단보다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높게 나타났습니다(t=3.87, p <. 001). 특히 읽기 태도는 비교적 안정적인 성향으로 여겨져 단기간에 변화하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는데, 약 5주간의 활동만으로도 의미 있는 차이가 나타났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저 역시 이 결과가 충분히 이해됐습니다. 교실에서 보면 책에 큰 관심이 없던 아이도 친구와 함께 읽기 시작하면 태도가 달라집니다. 내용을 모두 이해해서가 아니라 친구와 웃고 이야기하는 과정 자체가 즐겁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한 아이는 평소 자유선택활동 시간에 책 영역에 거의 가지 않았는데, 또래 읽기 활동 이후에는 "우리 또 이 책 읽자", "이번에는 내가 읽어줄게"라고 먼저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사회적 동기(social motivation)와도 연결됩니다. 사회적 동기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활동에 참여하려는 욕구를 의미합니다. 유아에게 책은 혼자 읽어야 하는 학습 자료보다 친구와 함께 경험하는 놀이가 될 때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결국 또래 간 그림책 읽기 활동의 힘은 책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책을 매개로 친구와 관계를 맺고 즐거움을 공유하는 경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책이 아니라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 덕분에 책을 좋아하게 된다면, 그것 역시 훌륭한 독서 교육 아닐까요?
또래 읽기가 효과적이려면 교사의 역할도 필요합니다
또래 간 그림책 읽기 활동이 효과적이라는 데는 저도 동의합니다. Vygotsky의 근접발달영역(ZPD) 이론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여기서 근접발달영역이란 혼자서는 할 수 없지만 타인의 도움을 받으면 가능한 발달 수준의 범위를 뜻합니다. 또래는 성인처럼 훨씬 앞선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비슷한 수준에서 더 편하게 사고를 확장시켜 줄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출처: 한국유아교육학회).
그런데 또래 간 활동이라고 해서 교사가 손을 놓아도 된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제가 직접 시도해봤을 때, 짝 활동이 자리를 잡기까지 초반에는 교사의 개입이 꽤 필요했습니다. 한 아이가 계속 말을 독점하거나, 반대로 한 명이 아예 말을 안 하는 경우도 있었거든요. 차례를 지키며 이야기하는 방법, 친구 의견에 반응하는 방법 같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려면 교사의 모델링과 격려가 먼저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이 연구에서도 교사 훈련을 2회에 걸쳐 실시하고, 짝 선정 방법이나 상호작용 격려 방식을 구체적으로 교육했다는 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또래 간 그림책 읽기 활동이 효과를 내려면, 그 배경에 교사의 세심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연구의 대상이 G시 소재 만 5세 유아 36명으로 한정되고, 실험 기간도 5주로 비교적 짧았다는 점은 고려가 필요합니다. 결과를 모든 유아에게 일반화하기보다는, 현장에서 시도해 보고 우리 반 아이들에게 맞는 방식으로 조율해 가는 것이 현실적인 접근이라고 봅니다.
또래 간 그림책 읽기는 저에게 "독서는 혼자 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 활동이었습니다. 이야기 이해력, 읽기태도, 의사소통 능력, 사회성까지 함께 자랄 수 있다면, 한 번쯤 교실에서 짝을 지어 책을 읽어보게 하는 것도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창한 준비 없이도, 친한 친구 둘이 나란히 앉아 그림책 한 권을 펼치는 것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참고: https://dcollection.jnu.ac.kr/public_resource/pdf/000000042834_20260607202256.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