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에서 'Swimmy'를 아이들과 함께 펼쳤던 날, 저도 처음엔 "이건 그냥 물고기 이야기잖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쏟아내는 질문들을 듣다 보니 제가 오히려 부끄러워졌습니다. 레오 리오니의 그림책은 겉으로는 단순한데, 한 꺼풀 벗겨보면 어른도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49살에 시작한 두 번째 인생, 그리고 우화 작가의 탄생
레오 리오니는 1910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미술관과 박물관을 놀이터 삼아 자랐고, 집안 곳곳에는 당대 거장들의 진품 작품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 환경 자체가 이미 하나의 교육이었던 셈이죠.
그런데 그가 그림책 작가로 데뷔한 건 49살 때였습니다. 제가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 나이에 새 분야에 발을 디딘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계기는 아주 소박했습니다. 세 살, 다섯 살짜리 손주들과 기차 여행을 하다가, 찡찡거리는 아이들을 달래려고 들고 있던 잡지를 뜯어서 즉석에서 이야기를 만들어줬습니다. 그게 바로 첫 작품 파랑과 노랑의 시작이었고, 이 작품은 뉴욕 타임스에서 큰 상을 받으며 그의 제2의 인생을 열었습니다.
레오 리오니의 작품은 우화(fable) 형식을 기반으로 합니다. 우화란 동물이나 사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인간의 삶을 풍자하고 교훈을 전달하는 짧은 이야기 장르입니다. 풍자, 비유, 상징이 핵심 키워드이며, 이솝 우화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레오 리오니의 작품에는 생쥐, 개구리, 물고기, 거북이 같은 동물들이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이게 단순한 취향이 아니었습니다. 어릴 때 그의 방은 그야말로 자연사 박물관 같았다고 합니다. 개구리, 곤충, 물고기, 조약돌, 조개껍질까지 가득 모아두었던 아이였으니, 40년 후 그림책 속 동물들은 결국 그 어린 시절 친구들이 다시 등장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애정이 담긴 캐릭터들은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Swimmy를 읽을 때 아이들이 물고기 한 마리 한 마리에 이름을 붙여주려 했던 것처럼요.
레오 리오니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주제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 자아 정체성 탐구: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 속하는가
- 차이와 공존: 다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갈 것인가
- 세계 평화와 반전: 욕심과 갈등이 아닌 나눔과 평등에 대한 염원
이 주제들은 그가 유대인으로서 나치의 박해를 피해 1939년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합니다. 전쟁의 공포를 직접 겪은 사람이 그림책에 담은 평화의 메시지는, 글자 수가 적을수록 오히려 더 깊이 울립니다.
콜라주 기법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그림 언어
레오 리오니 그림책의 두 번째 특징은 콜라주(collage) 기법입니다. 콜라주란 프랑스어에서 온 말로, 종이나 천 등 다양한 재료를 뜯거나 잘라 붙여 화면을 구성하는 미술 기법을 뜻합니다.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물성(物性)이 살아있는 재료들을 화면 위에 직접 붙이는 방식이라, 인쇄된 책으로 봐도 질감이 느껴지는 게 특징입니다.
프레드릭, Swimmy, 파랑과 노랑 같은 대표작들을 보면 이 콜라주 기법이 얼마나 일관되게 활용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찢기 기법, 즉 가위가 아닌 손으로 종이를 뜯어 불규칙한 경계선을 만드는 방식도 함께 사용되어, 그림 전체에서 따뜻하고 유기적인 느낌이 납니다.
제가 직접 아이들과 Swimmy를 보면서 느낀 건, 그림 속 바다 장면들이 마치 실제 수중 식물이나 해파리처럼 보인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이거 진짜 풀이야?"라고 물어보는 순간, 이 기법이 단순한 예술적 선택이 아니라 독자가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장치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레오 리오니의 콜라주 기법은 후세 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에릭 칼, 에즈라 잭 키츠 같은 작가들이 그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예입니다. 에릭 칼은 '색채 마술사'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화려한 콜라주 표현으로 유명한데, 그림 패턴 자체가 레오 리오니와 닮아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림책 한 장르에서 이렇게 뚜렷한 계보가 이어진다는 게 저는 참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참고로, 콜라주 기법을 현대 미술에서 최초로 체계화한 것은 피카소와 브라크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다양한 장르로 확산되었습니다(출처: 뉴욕현대미술관(MoMA)).
그림책 한 권으로 4주 수업이 가능한 이유
저는 한때 중등 독서논술 수업을 배운 적이 있었는데, 그때 교수님이 레오 리오니 그림책 한 권으로 4주짜리, 회당 1시간 30분 분량의 교육 계획안을 짜오라는 과제를 내주셨습니다. 그 당시 제 반응은 황당함이었습니다. 그림책 한 권인데 4주라니요. 억지로 끼워 맞추듯 계획안을 제출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림책을 제대로 공부하고 난 뒤에야 그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교수님이 무리한 과제를 낸 게 아니라, 레오 리오니의 그림책이 실제로 그 정도 깊이를 가진 텍스트였던 겁니다. 미안하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림책의 독자 연령을 따로 분류하는 개념을 그림책 문해력(picture book literacy)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림책 문해력이란, 글과 그림이 함께 만들어내는 의미를 복합적으로 읽어내는 능력을 말합니다. 단순히 글을 읽는 능력이 아니라, 시각 이미지와 서사 구조를 동시에 해석하는 고차원적인 독해 역량입니다. 레오 리오니의 작품이 유독 이 능력을 키우는 데 좋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책에는 표면적인 이야기 아래에 철학적 질문들이 층층이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림책은 아이들만을 위한 장르가 아닙니다. 국제그림책학회(IBBY, International Board on Books for Young People)는 그림책을 "모든 연령대를 위한 문학 형식"으로 정의하며, 성인 독자를 위한 그림책 연구도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출처: IBBY). 레오 리오니가 '현대 철학 우화의 거장'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그의 작품이 나이와 관계없이 독자의 삶에 철학적 질문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프레드릭을 예로 들면, 겨울을 대비해 열심히 식량을 모으는 생쥐들 사이에서 혼자 햇살과 색깔과 말을 모으는 시인 생쥐 프레드릭의 이야기입니다. 이 책 하나로 "예술가의 역할이란 무엇인가", "물질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 "공동체에서 다름은 어떻게 수용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끝없이 이어갈 수 있습니다. 제가 직접 이 책을 성인 독서모임에서 꺼낸 적이 있는데, 그날 토론이 예정 시간을 훌쩍 넘겼던 기억이 납니다. 얇고 단순한 그림책이 어떤 두꺼운 소설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끌어낸다는 걸 그날 처음 실감했습니다.
레오 리오니는 8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40여 편의 그림책을 남겼습니다. 49살에 시작해서 40년을 채운 셈입니다. 그 시간 동안 그가 탐구한 것은 결국 사람이 살면서 반드시 마주치게 되는 질문들이었습니다.
레오 리오니의 그림책을 처음 접하는 분이라면 Swimmy나 프레드릭을 먼저 펼쳐보시길 권합니다. 아이와 함께 읽어도 좋고, 혼자 조용히 읽어도 좋습니다. 그림을 먼저 훑어보고, 그다음에 글을 읽고, 그리고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보는 방식을 권합니다. 제 경험상 그 세 번의 반복 사이에서 처음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씩 드러납니다. 얇은 책 한 권이 이렇게 많은 걸 품고 있다는 사실, 직접 겪어보니 생각보다 훨씬 강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