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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의 산책' 그림책 놀이 (그림책 구조, 확장)

by seulki87 2026. 4. 26.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처음엔 그림책을 그냥 읽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글을 읽어주면 아이들이 듣고, 끝. 그게 다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로지의 산책』을 유아들과 함께 펼쳐 들고 나서야 제가 얼마나 좁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깨달았습니다. 글과 그림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그림책이라는 걸, 직접 아이들 반응을 보고 나서야 실감했습니다.

 

저자 팻 허친즈, 그림 팻 허친즈, 번역 김세실, 출판 봄볕, 발행 2020.05.20.

 

로지의 산책 그림책 놀이, 글과 그림이 다른 이야기를 하는 그림책의 구조

 

『로지의 산책』은 겉으로 보면 단순합니다. 암탉 로지가 농장을 산책하고 집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글 텍스트만 따라가면 로지가 마당을 가로질러, 연못을 돌아, 건초 더미를 지나가는 경로 설명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그림을 보면 완전히 다른 장면이 펼쳐집니다.

이것이 그림책 이론에서 말하는 그림-텍스트 간 아이러니(irony) 구조입니다. 여기서 아이러니 구조란, 글이 전달하는 내용과 그림이 보여주는 내용이 서로 충돌하거나 대조를 이루면서 독자가 두 가지 이야기를 동시에 읽어내도록 만드는 서사 기법을 말합니다. 로지는 산책길 내내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걸어가지만, 그림 속에서는 여우가 갈퀴에 걸리고, 연못에 빠지고, 벌통에 머리를 박는 장면이 페이지마다 이어집니다. 글만 읽으면 평범한 산책 이야기인데, 그림을 함께 보면 여우의 코미디 수난기가 되는 셈입니다.

 

제가 처음 아이들에게 이 책을 들려줄 때, 일부러 그림을 보여주지 않고 소리로만 읽어줬습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그린 그림 속 로지는 제각각이었습니다. 어떤 아이는 강아지처럼, 어떤 아이는 사람처럼 그려왔습니다. 암탉이라는 단서를 주지 않았을 때 상상이 얼마나 자유롭게 펼쳐지는지, 그때 처음 실감했습니다. 이것이 그림책을 '귀로 먼저 듣기'로 시작하는 이유입니다.

 

그림책 연구에서는 이처럼 텍스트와 그림 사이의 관계를 그림책 리터러시(picture book literacy)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그림책 리터러시란 글자를 읽는 능력을 넘어서 그림이 담고 있는 의미, 색, 구도, 캐릭터의 감정선까지 읽어내는 복합적인 독해 능력을 의미합니다. 유아기에 이 능력이 발달하면 이후 다양한 매체를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기초가 됩니다(출처: 한국어린이문학교육학회).

 

표지 읽기를 할 때도 제가 직접 써봤는데, 그림의 일부를 가리는 방식이 생각보다 효과가 컸습니다. 중요한 건 가리는 색입니다. 이 책의 주조색(dominant color)이 노란빛이기 때문에, 같은 노란 계열로 일부를 가려야 아이들이 가려진 부분을 자연스럽게 상상합니다. 여기서 주조색이란 그림책 전반에 걸쳐 가장 자주 등장하고 분위기를 지배하는 색조를 말합니다. 검은색이나 흰색으로 가리면 아이들이 가려진 것 자체를 이질적으로 받아들여 엉뚱한 방향으로 상상이 튀어버립니다. 저도 처음에 그냥 흰 종이로 가렸다가 아이들 반응이 예상과 전혀 달라서 당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로지의 산책』 활용 시 표지 읽기에서 확인할 핵심 포인트입니다.

  • 주조색과 같은 색으로 그림 일부를 가려서 자연스러운 상상을 유도한다
  • 제목을 먼저 보여주지 않고 그림만 보며 이야기를 예측하게 한다
  • 면지(endpaper) 색이 노란 계열인 이유를 아이들과 함께 찾아본다
  • 소리로 먼저 듣고 상상 그림 그리기를 한 뒤에 실제 그림을 확인한다

 

그림책 놀이로 확장했을 때 달라지는 것들

 

제가 직접 아이들과 해봤는데, 책 읽기가 끝난 뒤 교실 바닥에 농장 길을 만들어 걸어보는 활동이 예상보다 훨씬 반응이 좋았습니다. 처음엔 간단한 역할극 정도로 생각했는데, 아이들이 실제로 닭이 되어 울타리를 지나고 건초 더미를 피해 가면서 이야기 속 장면을 몸으로 기억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그림책 기반 극놀이(dramatic play)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극놀이란 이야기 속 상황을 몸과 목소리로 재현함으로써 서사 구조를 내면화하는 유아 놀이 방식을 의미합니다.

 

종이로 닭과 여우 인형을 만들어 직접 움직여보는 활동도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웠던 건, 책 속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는 아이보다 "여우가 이번엔 나무에 올라가면 어떨까?" 하며 새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아이들이 훨씬 많았다는 점입니다. 그림책이 출발점이 되어 아이들 스스로 이야기를 창작하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이 발달시키는 능력이 바로 서사적 상상력(narrative imagination)입니다. 서사적 상상력이란 이야기의 구조를 파악하고, 인물의 감정을 추론하며, 결말을 예측하거나 새로운 전개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말합니다. 유아기의 독서 경험이 이 능력의 기초가 된다는 점은 연구로도 뒷받침됩니다. 교육부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2022 개정 누리과정에서도 유아의 의사소통 영역에서 그림책을 통한 이야기 이해와 표현 활동을 핵심 경험으로 명시하고 있습니다(출처: 교육부 누리과정).

 

그림책 속 여우의 표정 변화를 따라가는 것도 아이들과 꼭 해볼 만한 활동입니다. 처음엔 자신만만하게 로지를 노리다가, 갈퀴에 걸리고 나서 표정이 바뀌고, 물에 빠지고 나서 또 달라집니다. 이 감정선을 페이지마다 확인하는 과정이 유아들의 감정 인식 능력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제 경험상 이 부분에서 아이들이 가장 크게 웃고, 가장 오래 책을 들여다봤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로지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집으로 돌아올 때, 그 직전 장면을 살짝 건너뛰고 "왜 여우가 도망갔을까?"를 먼저 물어보는 방식도 써봤는데, 아이들이 이야기 논리를 스스로 추론하려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로지의 산책』을 처음 접하는 분이라면, 책을 읽기 전에 소리만 먼저 들려주는 방식부터 시도해 보시길 권합니다. 상상의 여지가 얼마나 달라지는지 직접 겪어보시면 그 차이가 분명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림책은 읽어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놀이로 이어지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출발점이 됩니다. 앞으로도 글과 그림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을 꾸준히 찾아 아이들과 나눠보고 싶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z4mas54P0QY&list=PLYL5HwiWwpBJx8DUDqZ_fbmYC_bHdqH1_&index=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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