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그림책을 "듣기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유아들과 직접 그림책을 만들어보니, 그 안에서 일어나는 언어적·창의적 변화가 예상보다 훨씬 컸습니다. 특히 멀티미디어를 활용했을 때의 반응은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그림책 만들기, 언어능력- 듣기만 해서는 부족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동화책은 유아에게 읽어주면 충분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유아의 언어 발달은 수동적인 듣기보다 직접 말하고 표현하는 과정에서 훨씬 빠르게 이루어졌습니다.
유아기는 언어 발달의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결정적 시기란, 특정 능력이 가장 빠르게 발달하는 시간적 창으로, 이 시기를 놓치면 이후 같은 효과를 내기 어렵다는 개념입니다. 이 시기에 어떤 활동을 경험하느냐가 이후 언어 능력의 토대를 결정짓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직접 유아들과 그림책 만들기를 진행했을 때, 평소 말수가 적던 아이가 자기가 그린 그림을 설명하면서 서너 문장을 연달아 쏟아내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자신이 만든 결과물 앞에서는 언어표현력(language expression)이 자연스럽게 살아났습니다. 언어표현력이란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단어와 문장으로 연결하여 전달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 아이가 그 순간 보여준 변화는 어떤 설명보다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공변량분석(ANCOVA)을 활용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그림책 만들기 활동을 한 실험집단의 전체 언어능력 점수는 평균 61.27점으로, 전통적 방식으로 활동한 통제집단의 53.64점보다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높았습니다. 여기서 공변량분석(ANCOVA)이란 사전 검사 점수를 통계적으로 통제한 뒤 두 집단의 사후 차이만을 순수하게 비교하는 분석 방법입니다. 즉, 처음부터 언어 능력이 높았던 아이들의 영향을 제거하고도 멀티미디어 그룹이 더 높은 점수를 보였다는 뜻입니다(출처: 경인교육대학교 디지털컬렉션).
어휘력, 언어이해력, 언어표현력 세 가지 하위 영역 모두에서 실험집단이 유의미하게 높은 결과를 보였고, 유의확률은 모두 p <. 001 수준이었습니다.
멀티미디어가 창의성을 어떻게 자극했는가
창의성은 타고난 재능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관점에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활동을 함께하면서, 환경과 도구가 달라지면 같은 아이도 전혀 다른 상상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직접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Guilford와 Torrance가 제시한 창의성의 하위 구성요소는 유창성, 융통성, 독창성, 상상력으로 나뉩니다. 유창성(fluency)이란 하나의 문제 상황에서 가능한 한 많은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양적 능력이며, 융통성(flexibility)은 고정된 시각에서 벗어나 다른 방향의 해결책을 찾아내는 능력입니다. 독창성(originality)은 기존의 사고 틀을 벗어난 참신한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것이고, 상상력(imagination)은 과거 경험을 기반으로 새로운 표상을 구성하는 능력입니다.
제가 직접 지켜본 장면 중 하나는, 우주를 여행하는 토끼 이야기를 만들던 유아가 "토끼가 달에서 배추를 심으면 어떨까요?"라고 묻던 순간이었습니다. 이건 교사가 유도한 아이디어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화면에서 직접 확인하고 수정하는 경험이 그 아이의 상상력을 자극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멀티미디어 그림책 만들기 활동에서 창의성 측정에 활용된 항목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유창성: 실험집단 평균 5.91점 vs 통제집단 평균 5.12점
- 융통성: 실험집단 평균 5.42점 vs 통제집단 평균 4.58점
- 독창성: 실험집단 평균 5.15점 vs 통제집단 평균 4.36점
- 상상력: 실험집단 평균 4.58점 vs 통제집단 평균 4.00점
수치 자체보다 주목할 부분은, 네 가지 요소 모두에서 차이가 나타났다는 점입니다. 특정 영역에서만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창의성 전반에 걸쳐 고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활동 자체의 구조적 특성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아 스스로 이야기를 구상하고, 그림으로 표현하고, 다시 멀티미디어 형태로 완성하는 전 과정이 사고를 입체적으로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교육부 누리과정에서도 유아의 창의·인성 교육을 핵심 가치로 제시하고 있으며, 표현 활동과 언어 활동의 연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출처: 교육부).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교사의 역할입니다
멀티미디어를 활용하면 모든 것이 자동으로 해결된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생각이 가장 위험하다고 봅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태블릿이나 전자칠판을 켜두기만 해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교수학습매체(instructional media)로서 멀티미디어가 효과를 내려면, 유아가 매체를 도구로 활용하되 그 중심에 자신의 이야기와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교수학습매체란 학습 목표 달성을 위해 교사와 학습자 사이에서 정보를 전달하고 경험을 매개하는 모든 수단을 의미합니다. 기술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활동 과정에서 교사는 "다음에는 어떤 일이 생길 것 같아?", "주인공이 왜 그랬을까?"처럼 사고를 열어주는 발문을 던지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이 질문들이 유아의 언어표현력과 상상력을 이끌어냈습니다. 멀티미디어는 그 표현이 눈에 보이게 완성되도록 돕는 역할을 했습니다.
소그룹 활동 형태도 중요했습니다. 친구의 아이디어를 듣고 자신의 생각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단순히 개인의 창의성뿐 아니라 협력적 사고까지 자연스럽게 일어났습니다. 혼자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의 방향을 친구의 한마디가 열어주는 장면을 저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정리하면,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그림책 만들기 활동의 핵심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 유아가 이야기의 주도권을 가질 것
- 교사는 결과보다 과정을 지원하는 역할에 집중할 것
- 멀티미디어는 표현의 도구로만 사용하고, 활동의 주인공은 유아 자신이 될 것
유아 교육 현장에서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그림책 만들기 활동이 언어능력과 창의성 모두에 긍정적인 효과를 낸다는 것, 저는 연구 결과뿐 아니라 실제 경험을 통해서도 확인했습니다. 다만 기술 자체보다는 활동의 구조와 교사의 개입 방식이 결과를 결정짓는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활동을 처음 시도해 보시려는 분이라면, 완성된 결과물보다 아이들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 하나하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ginue.dcollection.net/public_resource/pdf/000000493650_20260606211436.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