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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생겼어요' 그림책 놀이 (상상력, 도입부, 후속 활동, 태도)

by seulki87 2026. 5. 7.

아이들에게 "망했어요"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솔직히 마음이 좀 쓰입니다. 실수 하나에 표정이 굳어버리는 걸 볼 때면, 이 경험이 이 아이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을지 걱정이 되거든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라는 그림책을 아이들과 함께 읽으면서, 그 "망했어요"가 전혀 다른 말로 바뀌는 걸 제가 직접 목격했습니다.

 

저자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번역 이지원, 출판 논장, 발행 2023.03.15.

 

문제가 생겼어요 그림책 놀이, 상상력을 건드리는 그림책의 구조

이 그림책은 폴란드 작가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작품입니다. 줄거리는 단순합니다. 할머니의 자수가 놓인 하얀 식탁보를 아이가 다림질하다 실수로 자국을 남기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아이들과 읽어보면, 이 단순한 설정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게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표지입니다. 책 표지 한가운데에 누렇게 눌린 다리미 자국이 그대로 찍혀 있는데, 처음 보는 순간부터 아이들은 이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제가 수업에서 이 표지를 보여주었을 때도 반응이 정말 다양했습니다. 어떤 아이는 “커피 쏟은 거 같아요”라고 했고, 또 다른 아이는 “달걀프라이 같아요”라고 말했습니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한 아이는 조심스럽게 “이거 다리미 자국 아니에요?”라고 이야기했는데, 그 순간 다른 아이들도 “아!” 하고 반응했습니다.

 

흥미로웠던 건 아이들의 생활 경험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는 점이었습니다. 요즘은 집에서 다리미질하는 모습을 자주 보기 어렵다 보니, 어떤 아이들에게는 그 자국 자체가 낯선 이미지였던 것입니다. 결국 아이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경험 안에서 그림을 해석하게 됩니다.

 

이처럼 그림책 속 시각적 단서(visual cue)는 독자의 배경지식을 끌어내는 중요한 장치로 작동합니다. 여기서 시각적 단서란 그림, 색감, 형태, 질감처럼 글 없이도 의미를 전달하는 이미지 요소를 말합니다. 아이들은 이 단서를 보며 “이건 뭘까?”를 스스로 추측하고, 자신의 경험과 연결하면서 이야기에 참여하게 됩니다.

 

본문에서도 이 구조는 계속 반복됩니다. 다리미 자국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전혀 다른 사물처럼 변형되어 등장하고, 책은 끊임없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너는 이게 뭐처럼 보여?”라고요. 결국 이 그림책의 핵심은 정답 찾기가 아니라, 하나의 형태를 얼마나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도입부에서 아이들의 뇌를 깨우는 방법

제가 이 그림책으로 수업을 할 때는 본문을 바로 펼치지 않고, 먼저 한붓그리기 활동을 도입으로 넣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집중 놀이 정도로 생각했는데, 실제로 해보니 아이들의 몰입 방식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한붓그리기란 선을 한 번도 떼지 않고 도형을 완성하는 활동으로, 수학적으로는 오일러 경로(Eulerian Path) 개념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오일러 경로란 그래프 안의 모든 선을 정확히 한 번씩만 지나가는 경로를 의미합니다. 물론 유아 수업에서 이 개념 자체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은 놀이 과정 안에서 자연스럽게 ‘길 찾기’와 ‘문제 해결’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네 가지 도형을 보여주고 “이건 한 번에 그릴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하게 했습니다. 어떤 아이는 중간에서 선이 끊겨 버렸고, 어떤 아이는 시작점을 바꿔 다시 도전했습니다. 흥미로웠던 건 아이들이 실패 자체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아! 여기서 다시 하면 되네!” 하며 스스로 방법을 수정해 나갔습니다.

 

이 과정은 단순한 그리기 활동이 아니라 시행착오(trial and error)를 경험하는 과정과 연결됩니다. 시행착오란 여러 번의 실패와 수정 과정을 거치며 해결 방법을 찾아가는 학습 방식인데, 유아기 문제 해결력 발달에서 매우 중요한 경험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 짧은 도입 활동의 효과는 그림책을 읽는 순간 확실히 드러났습니다. 활동 없이 바로 책을 읽었을 때 아이들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 가까웠다면, 한붓그리기 이후에는 “다른 방법 없을까?”, “이렇게 하면 되잖아!” 하며 주인공의 문제 해결 과정에 훨씬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제 경험상 좋은 그림책 수업은 책을 읽는 순간부터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의 머리와 감각이 먼저 깨어나는 도입부에서 이미 절반은 결정되고 있었습니다.

문제해결력과 창의미술을 잇는 후속 활동

그림책을 다 읽고 난 뒤 저는 아이들에게 두 가지 활동지를 제시했습니다. 하나는 다리미 자국이 붙은 활동지, 다른 하나는 얼룩이 묻은 와이셔츠 모양 활동지였습니다. "선생님 남편 와이셔츠에 음식물이 묻었는데, 이걸 너희가 해결해 줄 수 있어?"라고 이야기했더니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도움 요청이라는 프레임이 의외로 강력한 동기 유발 요인이 되었습니다.

 

결과물이 정말 다양했습니다.

  • 빨간 얼룩을 토마토로 바꾼 아이
  • 고구마 모양으로 해석해 줄기까지 그린 아이
  • 얼룩 주변에 단추 구멍 장식을 그려 넣은 아이
  • 다리미 자국을 로켓 발사대로 표현한 아이

이러한 창의적 표현 활동은 조형적 사고(plastic thinking)와 연결됩니다. 여기서 조형적 사고란 기존의 형태를 다른 의미로 재해석하고 새로운 이미지로 변환하는 사고 과정을 뜻합니다. 아이들이 얼룩을 그냥 얼룩으로 보지 않고 자신만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이 활동의 핵심입니다.

 

실제로 유아교육 분야 연구에서도 개방형 미술 활동이 아동의 창의적 자기표현 능력과 문제해결 태도 형성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가 나와 있습니다(출처: 한국유아교육학회). 활동 결과물보다 과정에서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 이 수업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그림책이 만드는 문제 해결 태도

아이들이 실수나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에 대해, 저는 꽤 오랫동안 관찰해 왔습니다. 초기에는 대부분 "어떡해요", "망했어요"라고 말하며 활동을 멈춥니다. 그런데 이 그림책을 경험한 이후 교실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더라고요. 블록이 무너졌을 때, 그림을 잘못 그렸을 때 아이들이 "이거 다른 걸로 만들면 되지!"라고 스스로 말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태도 변화가 아닙니다. 교육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성장 마인드셋(growth mindset) 형성과 연결되는 변화입니다. 성장 마인드셋이란 실패를 고정된 결과가 아니라 성장을 위한 과정으로 바라보는 사고방식을 의미합니다. 캐럴 드웩(Carol S. Dweck)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어린 시기에 이러한 사고방식을 경험한 아이들은 이후 학습 도전 상황에서 더 높은 회복탄력성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출처: 스탠퍼드 대학교 마인드셋 연구소).

 

그림책 한 권이 그 경험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게, 제가 이 수업을 계속하는 이유입니다.

 

『문제가 생겼어요』는 완벽한 결말을 주는 책이 아닙니다. 문제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문제를 다르게 바라보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이 그림책을 아직 교실에서 써보지 않으셨다면, 도입부 체험 활동과 함께 활용해 보시길 권합니다. 아이들이 "망했어요" 대신 "다르게 해 볼게요"라고 말하는 순간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QTa6AoRXYMQ&list=PLYL5HwiWwpBJx8DUDqZ_fbmYC_bHdqH1_&index=132&t=741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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