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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간접경험의 힘, 세계관 형성 도구)

by seulki87 2026. 4. 13.

그림책은 단순히 아이들을 재우기 위한 이야기책이 아닙니다. 저는 유치원 교사로 일하면서 이 사실을 매일 확인합니다. 아이들이 책 한 장을 넘기며 던지는 질문들이 때로는 어른의 시선으로도 쉽게 답하기 어려운 깊이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림책이 아이들에게 세상을 보여주는 창이라는 말, 정말 맞습니다.

 

 

그림책이 세상을 보여주는 창이 되는 이유: 간접 경험의 힘

 

그림책에는 픽처 리터러시(Picture Literacy)라는 개념이 적용됩니다. 여기서 픽처 리터러시란 그림을 통해 의미를 읽고 해석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아직 글자를 완전히 익히지 못한 유아들이 그림책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첫 번째 언어가 바로 이 그림 언어입니다. 저는 교실에서 아이들이 글자는 몰라도 그림 한 장에서 인물의 감정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장면을 수없이 봐왔습니다. 그 순간이 올 때마다 솔직히 놀랍습니다.

 

찰스 키핑의 『창 너머』는 이 개념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주인공 제이콥은 2층 거실 창문을 통해서만 세상을 봅니다. 커튼 사이로 조금씩 열리는 거리 풍경, 꼬부랑 할머니와 그의 개, 양조장 말들이 질주하는 장면. 아이는 자신이 열어놓은 커튼의 폭만큼만 세상을 경험합니다. 제이콥의 세계관은 그 커튼 너비에 갇혀 있는 셈입니다.

 

반대로 아라이 료지의 『아침에 창문을 열면』에 등장하는 소녀는 다릅니다. 의자에 올라서서 자기 키보다 높은 창을 두 팔로 활짝 열고, 결국 집 밖으로 나와 나무 그늘 아래에서 바람을 맞습니다. 소녀의 시야는 산, 도시, 강, 바다로 계속 넓어집니다. 저는 이 두 작품을 처음 비교해서 읽었을 때 단순히 밝고 어두운 그림책의 차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이건 아이에게 어떤 '창'을 열어줄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그림책의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 즉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이 아이의 세계관 형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이미 여러 연구에서 확인됩니다. 국내 유아교육 분야에서도 그림책 읽기와 사회정서 발달의 상관관계가 꾸준히 연구되어 왔으며, 책을 통한 간접 경험이 공감 능력 형성에 유의미한 영향을 준다는 결과가 보고되고 있습니다(출처: 한국어린이문학교육학회).

두 그림책을 비교하며 제가 특히 주목한 포인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 『창 너머』: 닫힌 시야, 모호함과 불안, 수동적 관찰자
  • 『아침에 창문을 열면』: 열린 시야, 환희와 기대, 능동적 참여자
  • 두 작품 모두 '창'이라는 동일한 매개체를 사용하지만, 그 창을 어떻게 여는지에 따라 세상의 크기가 달라집니다.

 

세계관 형성 도구로서의 그림책: 아이들에게 어떤 창을 보여줄 것인가

 

그림책의 비주얼 메타포(Visual Metaphor)는 어른이 설명하기 어려운 개념을 아이에게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핵심 장치입니다. 비주얼 메타포란 특정 이미지를 통해 추상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표현 방식으로, 그림책에서는 색깔, 구도, 빛의 방향 같은 요소들이 모두 이 역할을 합니다. 제이콥의 이야기에서 흐릿한 실내와 차가운 색조, 그리고 유리에 서린 입김으로 그린 웃음 짓는 할머니 그림. 저는 그 장면을 읽으며 이게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현실을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라는 걸 느꼈습니다.

 

실제로 저도 딸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줄 때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등장인물이 이사를 가는 장면에서 아이가 "그 친구는 슬프겠다, 우리도 이사하면 어떡해?"라고 물어왔을 때, 저는 그림책 한 권이 아이에게 이별과 변화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안전하게 경험하게 해 준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어떤 직접 교육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방식입니다.

 

C.S. 루이스는 문학 비평서 『실험』에서 어린 시절 베아트릭스 포터의 『피터 래빗』에 매료됐다고 회상합니다. 그 이야기 속 말하는 동물들이 훗날 『나니아 연대기』의 신화적 캐릭터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유아기의 그림책 경험이 한 사람의 세계관과 창작 언어를 형성하는 데 얼마나 깊이 작용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그림책의 서사적 각인 효과입니다. 서사적 각인이란 이야기가 독자의 기억 속에 새겨져 이후의 인식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뜻합니다.

 

유아의 인지 발달 측면에서도 그림책의 역할은 명확합니다. 피아제(Piaget)의 인지발달이론에 따르면, 유아기는 상징적 사고가 시작되는 전조작기(Pre-operational Stage)에 해당합니다. 전조작기란 실물이 없어도 이미지나 언어를 통해 대상을 인식하고 표현할 수 있게 되는 시기를 말합니다. 그림책의 그림은 실물이 아닌 이차원 이미지이지만, 부모가 이름을 불러주고 아이가 그 언어와 이미지의 관계를 이해하면서 세상이 아이의 마음속에 자리를 잡아가는 것입니다. 유치원 교사로서 이 과정을 매일 옆에서 지켜보는 저로서는, 그림책 한 권 한 권이 아이의 내면세계를 구성하는 벽돌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출처: 한국교육개발원).

 

그림책과 창이 모두 사각형이라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아이는 창을 통해 밖을 보듯, 그림책의 사각 프레임을 통해 또 다른 세상을 들여다봅니다. 어떤 창을 열어주느냐가 아이가 보게 될 세상의 크기를 결정합니다.

그림책을 고를 때 부모와 교육자가 함께 고민해 볼 기준이 있습니다.

  1. 아이의 시야를 넓혀주는가, 좁히는가
  2. 감정을 안전하게 경험하게 해 주는가
  3.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환대의 감각을 심어주는가

그림책은 결국 아이에게 세상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어른들의 선택입니다.

그림책을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책으로만 보던 시각이 있다면, 조금 다른 눈으로 다시 한번 살펴보시길 권합니다. 저도 유치원 교사이자 한 아이의 부모로서 그림책 한 권을 고를 때 이제는 이야기의 재미만이 아니라 그 책이 아이에게 어떤 세계를 보여주는지를 먼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이와 함께 그림책 한 권을 펼치며 "넌 이 장면에서 뭐가 보여?"라고 물어보는 것, 그것이 가장 좋은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OHP018qpP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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