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책』 한 권이 국내에서만 75만 부 이상 팔렸습니다. 처음 그 수치를 접했을 때 저도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그림책 한 권이 이 정도 판매고를 올렸다면, 단순히 아이들이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 어른들 마음까지 건드린 게 분명합니다. 아이와 함께 앤서니 브라운의 책을 펼쳤다가, 어느새 제가 더 빠져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작가를 알면 그림이 달라 보입니다
앤서니 브라운은 1946년 영국 셰필드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자연스럽게 시각적 감수성을 키웠는데, 이 배경이 훗날 작품 세계에 그대로 녹아들었습니다.
그가 대학에서 전공한 분야는 그래픽 디자인이었지만, 졸업 후 처음 취직한 곳은 병원이었습니다. 리즈 종합 병원에서 2년 반 동안 메디컬 일러스트레이터(medical illustrator)로 일했는데, 메디컬 일러스트레이터란 수술 과정이나 신체 구조를 정확하게 그림으로 표현하는 의학 전문 화가를 말합니다. 이 경험이 그의 작품에서 도드라지는 극사실주의(hyperrealism) 표현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극사실주의란 사진처럼 세밀하고 정확하게 대상을 묘사하는 화풍으로, 앤서니 브라운 그림책에서 배경이나 사물이 유독 정교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병원을 그만둔 뒤에는 15년간 골든 프레이즈 갤러리에서 축하 카드 디자이너로 일했습니다. 이 시기에 다양한 화풍과 스타일을 실험하며 일러스트레이터로서 폭을 넓혔고, 이후 어린이책 편집자 줄리아 맨사일을 만나면서 그림책 작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그의 그림책을 함께 읽을 때, 그림 하나하나가 어느 전시회 작품 못지않게 정밀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를 나중에야 알았는데, 바로 이 의학 세밀화 훈련 덕분이었습니다.
앤서니 브라운은 2000년 어린이 문학 분야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Hans Christian Andersen Award)을 수상했습니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이란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IBBY)가 2년마다 수여하는 상으로, 전 세계 어린이 문학에 지속적으로 기여한 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주어지는 최고 권위의 상입니다(출처: IBBY 공식 사이트).

그림책에 숨겨진 세 가지 놀이
앤서니 브라운 그림책을 처음 접한 분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림이 왜 이렇게 복잡하지?"입니다. 저도 딸과 함께 『숲 속으로』를 처음 읽을 때 똑같은 반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단순히 복잡한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설계된 구조라는 걸 알고 나서, 책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의 그림책에는 크게 세 가지 놀이적 요소가 있습니다.
- 숨은그림찾기: 배경과 사물 속에 다른 이야기나 캐릭터를 숨겨두는 방식입니다. 『숲 속으로』에서는 헨젤과 그레텔, 라푼젤, 백설공주 등 여러 옛이야기 속 요소들이 그림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 모양 상상하기(변형): 벨기에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변형' 기법에서 직접 영향을 받은 방식입니다. 『돼지책』에서 엄마가 집을 나간 뒤 벽지, 전등, 식탁 등 집 안 모든 사물이 서서히 돼지 모양으로 바뀌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 다른 그림 찾기: 『앤서니 브라운의 행복한 미술관』처럼 명화를 패러디하여 독자가 원작을 떠올리며 비교하는 즐거움을 주는 방식입니다.
제가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숲 속으로』를 읽을 때, 한 아이가 "여기 빨간 망토 있어요!" 하고 소리를 지르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책을 두 번, 세 번 다시 펼쳐보며 새로운 걸 찾아내는 눈빛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 숨은 그림 찾기 요소는 아이들이 책을 반복해서 읽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장치입니다.
초현실주의(surrealism) 기법이 어떤 건지 모르면 그림책이 그냥 이상해 보일 수 있습니다. 초현실주의란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장면을 마치 실제처럼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예술 사조입니다. 앤서니 브라운이 르네 마그리트의 영향을 받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사실적인 묘사력 위에 비현실적인 상상력을 얹어야 그 긴장감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손님』에서 불안한 감정을 초현실적인 장면으로 표현한 방식이 그 좋은 예입니다.
그림책으로 아이와 더 깊이 대화하는 법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그림이 예쁜 책 정도로 생각했는데, 작가의 삶과 그림책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알고 나서부터 읽는 깊이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앤서니 브라운은 자신의 가족과 주변 인물을 그림책 속에 직접 재현하는 방식으로 작업합니다. 작품 대부분의 모티브가 작가 본인의 성장 과정과 가족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실제로 영국 도서관 협회(CILIP)의 자료에 따르면 앤서니 브라운은 그림책을 통해 가족 관계, 정체성, 감정 표현 등 아이들이 직면하는 실제 문제를 일관되게 다루어 왔으며, 이런 이유로 영국과 한국 양쪽의 중학교 교과서에도 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출처: CILIP).
그래서 저는 아이와 책을 읽을 때 이렇게 접근하면 효과적이라고 느꼈습니다.
- 먼저 그림을 충분히 살펴보는 시간을 줍니다. 글을 읽기 전에 그림만 보며 "여기에 뭐가 있을까?" 하고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아이의 집중도가 달라집니다.
- 변형된 사물을 함께 찾습니다. 『돼지책』이라면 몇 페이지부터 돼지 모양이 나타나는지 탐정처럼 찾아보는 식입니다.
- "왜 이렇게 그렸을까?"를 같이 생각해봅니다. 정답이 없는 질문이기 때문에 아이도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습니다.
딸과 함께 이 방식으로 읽었을 때, 딸이 스스로 "엄마가 없으니까 집이 돼지우리가 됐나 봐요"라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설명한 게 아니라 그림을 보고 스스로 의미를 끌어낸 것입니다. 그때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이 단순한 이야기책이 아니라는 걸 몸으로 느꼈습니다.
그림책을 고를 때 "아이가 좋아하나"만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앤서니 브라운의 책은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그 그림이 어디서 왔는지를 조금만 알아도 함께 읽는 시간이 훨씬 풍성해집니다. 아직 그의 책을 펼쳐보지 않으셨다면, 『돼지책』 한 권부터 시작해 보시길 권합니다. 읽다 보면 분명 아이보다 어른이 먼저 "이게 뭐지?" 하고 그림을 들여다보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