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없는 그림책을 아이들과 함께 펼쳐 든 순간, "선생님, 이 책은 글이 없어요"라는 말이 먼저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분 뒤, 같은 아이가 그림 속 인물의 표정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이 아이 지금 많이 속상한 것 같아"라고 했습니다. 글자 한 자 없는 책이 그 어떤 긴 문장보다 깊은 이야기를 끌어낸 순간이었습니다.

유아의 그림책 속 인물 이해 탐색, 글 없는 그림책이 유아에게 특별한 이유
글 없는 그림책(wordless picture books)은 문자 없이 그림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독특한 도서 장르입니다. 여기서 글 없는 그림책이란 단순히 텍스트가 빠진 책이 아니라, 그림 자체가 서사의 전부가 되는 구조로 설계된 책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인 그림책이 글과 그림의 상호 보완으로 이야기를 완성한다면, 글 없는 그림책은 독자 스스로가 그림을 읽고 의미를 완성해야 한다는 점에서 능동적 읽기 경험을 요구합니다.
제가 직접 아이들과 이 책을 읽어보니,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유아들이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특히 인물의 자세나 주변 사물의 배치를 보고 상황을 유추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같은 장면을 두고 "저 아이는 도망가고 싶은 거야"라고 말한 유아가 있는가 하면, "아니야, 뭔가를 기다리는 거야"라고 다르게 읽어내는 유아도 있었습니다. 정답이 없는 텍스트 공간이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글 없는 그림책은 유아가 그림 해석 기술과 표상 능력(representation skill)을 향상하는 데 효과적인 매체입니다. 여기서 표상 능력이란 눈에 보이는 그림을 머릿속에서 의미 있는 이야기로 변환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유아는 이 과정을 통해 단순히 그림을 감상하는 수준을 넘어, 이야기를 예측하고 구성하는 사고 전략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됩니다(출처: 부산대학교 교육학 박사논문).
유아가 인물을 읽어내는 방식 — 겉모습에서 속마음까지
유아의 인물 이해 과정을 들여다보면, 크게 두 층위로 나뉩니다. 외재적 인물화(external characterization)와 내면적 특성 파악이 그것입니다. 외재적 인물화란 인물의 겉모습, 행동, 표정 등 눈에 보이는 요소를 통해 그 인물을 이해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유아 대상의 그림책이 이 외재적 인물화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Piaget의 인지 발달 이론에 따르면 만 2~7세의 전조작기 유아는 즉각적이고 외현적인 지각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쉽게 말해, 눈에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세상을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제 경험상 이건 실제로 꽤 정확합니다. 아이들은 인물의 울상을 보고 "슬프다", 뛰어가는 모습을 보고 "신났다"라고 곧바로 반응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그다음이었습니다. 만 4세 이상의 유아들은 마음의 이론(Theory of Mind)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단순한 외형 너머를 읽으려 합니다. 마음의 이론이란 타인도 자신과는 다른 생각, 감정, 의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능력으로, 사회적 인지 발달의 핵심 지표로 꼽힙니다. 실제로 제가 함께 책을 읽던 유아 중 한 명은 웃고 있는 인물을 보고 "근데 이 아이 사실은 무서운 것 같아, 억지로 웃는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 한 마디에 저는 꽤 오래 멈춰 있었습니다.
글 없는 그림책에서 이루어지는 인물 이해의 핵심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외형적 특성 파악: 인물의 겉모습, 표정, 몸짓을 통해 상황과 감정을 읽어내는 과정
- 내면적 특성 추론: 인물의 심리 상태와 동기를 그림 단서를 토대로 상상하는 과정
- 이야기 재화(再話): 유아가 책을 보고 자신만의 언어로 이야기를 새롭게 구성하여 들려주는 행위
- 공감과 동일시: 독자인 유아가 인물의 감정에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몰입하는 심리적 과정
국내 유아 교육 현장에서도 이러한 문학적 경험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으며, 교육부의 2019 개정 누리과정에서도 유아가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경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출처: 교육부 누리과정 포털).
교사가 글 없는 그림책 활동에서 주의해야 할 것
솔직히 이건 처음에 예상 밖이었습니다. 글 없는 그림책이니까 아이들이 알아서 자유롭게 이야기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교사의 말 한마디가 그 흐름을 완전히 바꿔버릴 수 있다는 걸 직접 겪어보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이 표정은 슬픈 거지?"라고 교사가 먼저 방향을 잡아버리면, 아이들은 대부분 "네"로 수렴합니다. 아이 각자가 읽어내던 해석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글 없는 그림책 활동에서 교사의 역할은 이야기를 완성해 주는 것이 아니라, 유아가 스스로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도록 공간을 열어두는 것입니다. 제가 경험상 가장 효과적이었던 질문은 "왜 그렇게 생각했어?"였습니다. 이 질문 하나로 아이들은 자신의 해석에 근거를 붙이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훨씬 풍부한 언어 표현이 나왔습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장면은, 평소 발표를 거의 하지 않던 유아가 그림책 앞에서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말 대신 그림 속 인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 아이 여기 혼자 있어"라고 속삭였습니다. 짧지만, 그 아이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글 없는 그림책이 언어 표현력과 무관하게 모든 유아에게 열려 있는 매체라는 점, 그게 이 활동의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림 없는 그림책에서 유아가 구성하는 이야기, 즉 이야기 재화(再話)는 단순한 발표 활동이 아닙니다. 이야기 재화란 유아가 그림책을 보고 자신의 경험과 감정, 상상을 녹여 새롭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행위로, 유아의 인물 이해 수준을 가장 잘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정답을 묻는 활동이 아니라, 각자의 해석을 존중하는 활동으로 설계될 때 비로소 이 재화는 교육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글 없는 그림책 한 권이 품고 있는 가능성은 생각보다 훨씬 넓습니다. 아이들이 그림 속 인물의 마음을 읽어내고,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를 다시 짓는 그 과정 자체가 이미 깊은 문학 경험입니다. 교사로서 해야 할 일은 그 이야기를 교정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들어주는 것이라는 걸, 제가 직접 겪어보며 확실히 느꼈습니다. 글 없는 그림책을 아직 활용해보지 않으셨다면, 아이들과 함께 그림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한 번 만들어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dcollection.pusan.ac.kr/public_resource/pdf/000000081026_20260518102240.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