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존 버닝햄 그림책 (화풍 특징, 페이지 구성, 상상력)

by seulki87 2026. 4. 13.

 

존 버닝햄의 그림책은 아이들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왼쪽과 오른쪽이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이 책을 펼쳤을 때, 그림 앞에서 멈추고 스스로 이야기를 꺼내는 아이들을 보며 저도 처음엔 왜 이렇게 그렸나 싶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게 전부 계산된 장치였습니다.

 

쓱쓱 그린 것 같은데 왜 멈추게 되는가 — 존 버닝햄의 화풍 특징

 

존 버닝햄의 그림책을 처음 접한 분들은 대부분 비슷한 반응을 보입니다. "이거 대충 그린 거 아니야?" 저도 솔직히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배경은 흰 여백 그대 로고, 지운 연필 자국이 남아 있고, 얼굴은 눈 두 개 점으로, 입은 이모티콘처럼 줄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이분의 핵심 전략입니다. 이를 그림책 이론에서는 미결정성(indeterminacy)이라고 부릅니다. 미결정성이란 그림이나 이야기 속 특정 요소를 의도적으로 완성하지 않아 독자가 자신의 감정과 상상력으로 채워 넣도록 유도하는 기법입니다. 얼굴 표정을 명확히 그리지 않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슬픈 상황이면 보는 사람이 슬픈 얼굴을 그 자리에 집어넣고, 기쁜 장면이면 기쁜 표정을 자연스럽게 투영합니다.

 

유치원 아이들과 책을 읽을 때 실제로 이런 장면이 많았습니다. 아이들이 "얘 지금 슬픈 거야?"라고 물으면 옆 친구가 "아니, 화난 거야"라고 맞받아쳤습니다. 둘 다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림이 그 해석을 모두 허용하도록 그려져 있었으니까요.

존 버닝햄이 이런 화풍을 갖게 된 건 그의 성장 배경과 떼어놓기 어렵습니다. 1936년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세일즈맨 아버지를 따라 여러 지역을 옮겨다니며 자랐고, 총 아홉 개의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중 가장 오래 다닌 곳이 서머힐(Summerhill)입니다. 서머힐이란 영국의 자유주의 대안 교육학교로, 규칙조차 교직원과 학생이 함께 토론해서 정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기숙학교입니다. 정해진 틀 없이 마음껏 표현하는 환경이 그의 그림체 자체를 형성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분은 런던 센트럴 아트 스쿨(Central School of Art and Design)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한 뒤 처음엔 포스터 제작을 했습니다. 그러다 포스터에 스토리를 입히기 시작했고, 결국 글과 그림을 모두 직접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첫 출판사 제출 때 "이건 일러스트레이션이 아니라 포스터"라는 평가를 받고 거절당했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물이 지금 우리가 보는 그림책들입니다.

 

왼쪽과 오른쪽이 다른 이유 — 아동 심리가 담긴 페이지 구성

 

존 버닝햄 그림책의 가장 독특한 구조는 좌우 대비(bilateral contrast) 방식입니다. 좌우 대비란 펼친 책의 왼쪽 페이지와 오른쪽 페이지가 서로 다른 세계, 다른 감정, 다른 색채로 표현되는 구성 방식입니다. 처음 봤을 때 "왜 이야기가 연결이 안 되지?"라고 느끼는 게 당연한 반응인데, 이게 오히려 의도된 단절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각대장 존'입니다. 학교 가는 길은 컬러로, 도착한 학교 안은 흑백으로 표현됩니다. 선생님은 갈수록 화면에서 커지고, 아이는 점점 작아집니다. 권위적인 어른 앞에서 아이가 얼마나 위축되는지를 색과 크기만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서머힐 출신인 존 버닝햄이 권위적인 교육 환경을 얼마나 싫어했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딸과 함께 그의 그림책을 읽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제 딸은 한 페이지 안에서 작은 그림 하나를 발견하고 "여기에도 이게 있어!"라며 저보다 훨씬 먼저 알아챘습니다. 어른 눈에는 여백으로 보이는 곳이, 아이 눈에는 탐험 공간이었던 겁니다.

이 좌우 대비 구성에서 존 버닝햄이 담아낸 심리적 메시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색채 대비: 컬러는 자유와 생기, 흑백은 억압과 통제를 상징
  • 크기 대비: 어른이 클수록 아이는 작아지며 권력 관계를 시각화
  • 세계 분리: 왼쪽은 현실(어른의 시선), 오른쪽은 상상(아이의 내면)

이 구조는 단순히 미적 선택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하는지를 반영한 결과입니다. 그림책 전문가들이 "글은 간결하고 그림은 단순하지만 메시지는 묵직하다"라고 평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판타지 세계로 달아나는 아이들 — 상상력이 주는 실질적인 효과

 

존 버닝햄 그림책에서 아이들은 현실이 답답해지면 어김없이 상상의 세계로 넘어갑니다. 엄마가 잔소리를 늘어놓는 동안 아이는 이미 말을 타고 다른 세계로 달려가 있습니다. 좌우 페이지가 연결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한쪽은 엄마의 현실, 다른 쪽은 아이의 판타지입니다.

이 판타지 경험이 단순한 현실 도피가 아니라는 점은 아동 발달 연구에서도 뒷받침됩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연구에 따르면, 풍부한 상상 놀이(imaginative play)를 경험한 아이들은 문제 해결력과 정서 조절 능력에서 더 높은 발달 지수를 보인다고 보고된 바 있습니다(출처: 옥스퍼드대학교 아동발달연구소). 쉽게 말해, 판타지 그림책을 충분히 경험한 아이는 현실의 문제 앞에서 더 다양한 해법을 떠올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국내에서도 그림책이 아동의 정서 발달에 미치는 효과는 꾸준히 연구되어 왔습니다. 한국어린이문학교육학회는 판타지 서사를 담은 그림책이 아이들의 자아 효능감(self-efficacy)과 공감 능력 향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어린이문학교육학회). 여기서 자아 효능감이란 자신이 어떤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말합니다.

제가 유치원에서 직접 아이들과 존 버닝햄 그림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도 이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작고 약한 아이가 상상의 세계에서만큼은 완전한 주인공이 됩니다. 그 경험이 아이들에게 어떤 식으로 내면의 에너지를 채워주는지,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참 그 세계 이야기를 이어가는 아이들을 보며 실감했습니다.

 

존 버닝햄은 어른들을 책 속에서 대체로 권위적이거나 둔감하게 그립니다. 자녀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부모, 자기 기준으로만 아이를 평가하는 선생님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이게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아마 그게 정확히 이 작가가 원한 반응일 겁니다. 저도 책을 읽을 때마다 "나는 어떤 어른이었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존 버닝햄의 그림책은 아이들보다 오히려 어른이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상상력과 자기 세계를 지킬 힘을 주고, 어른들에게는 아이 눈높이를 잊고 살았던 시간을 조용히 돌아보게 만듭니다. 지각대장 존 한 권을 두 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첫 번째는 아이와 함께, 두 번째는 혼자서요. 두 번째 읽을 때 보이는 것들이 분명히 다를 겁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mpuDohY8pzk&t=9s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

© 2026 블로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