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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닝햄 그림책 (화풍 특징, 페이지 구성, 상상력)

by seulki87 2026. 4. 13.

존 버닝햄의 그림책은 아이들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왼쪽과 오른쪽이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이 책을 펼쳤을 때, 그림 앞에서 멈추고 스스로 이야기를 꺼내는 아이들을 보며 저도 처음엔 왜 이렇게 그렸나 싶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게 전부 계산된 장치였습니다.

 

존 버닝햄 그림책, 쓱쓱 그린 것 같은데 왜 멈추게 되는가? 화풍 특징

처음 John Burningham의 그림책을 펼쳤을 때, 저도 솔직히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거… 대충 그린 거 아닌가?” 배경은 거의 비어 있고, 연필 자국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인물의 얼굴은 점 두 개와 선 하나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익숙한 ‘정교한 그림책’의 기준으로 보면 다소 거칠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몇 장 넘기지 못하고 다시 멈추게 됩니다. 이유를 생각해 보니, 그림이 덜 그려져 있어서가 아니라 ‘덜 정해져 있어서’였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읽을 때 그 차이가 더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한 장면을 보며 “이 친구 지금 어떤 기분일까?”라고 물으면, 아이마다 전혀 다른 대답이 나옵니다. “슬퍼 보여요”, “아니에요, 화난 거예요” 같은 말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누구의 말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림이 그 해석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특징은 그림책 이론에서 말하는 ‘미결정성(indeterminacy)’과 연결됩니다. 작가가 일부 요소를 의도적으로 비워 두면서, 독자가 자신의 감정과 경험을 그 안에 채워 넣도록 만드는 방식입니다. 표정을 구체적으로 그리지 않은 얼굴, 여백이 많은 배경, 거칠게 남겨둔 선 하나까지 모두 이 역할을 합니다. 저는 이걸 ‘덜 그려서 더 많이 보게 만드는 그림’이라고 느꼈습니다.

 

이러한 화풍은 그의 성장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John Burningham은 어린 시절 여러 학교를 옮겨 다니며 지냈고, 특히 자유로운 분위기의 Summerhill School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정해진 방식보다 개인의 표현을 중시하는 환경 속에서 자란 경험이, 지금의 자유롭고 열린 그림 스타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Central School of Art and Design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한 뒤 포스터 작업을 하며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이력만 보면 오히려 ‘정교하게 그릴 수 있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완성도를 높이는 대신, 일부를 비워두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그의 그림책을 볼 때 “왜 이렇게 그렸을까?”보다 “이 빈 공간에 나는 무엇을 보게 될까?”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 우리가 그 책에서 멈추게 되는 이유도, 그 빈자리를 무의식적으로 채우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왼쪽과 오른쪽이 다른 이유 — 아동 심리가 담긴 페이지 구성

John Burningham의 그림책을 읽다 보면 처음에는 조금 낯선 순간을 만나게 됩니다. 분명 한 장면인데, 펼친 페이지의 왼쪽과 오른쪽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왜 연결이 안 되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이와 함께 읽다 보니 그 단절이 오히려 중요한 장치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딸과 함께 책을 보던 중이었습니다. 저는 큰 장면 위주로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아이는 한쪽 페이지 구석에 작게 그려진 그림을 발견하고 “여기에도 이게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어른인 저는 그냥 지나쳤던 부분이었는데, 아이에게는 그 작은 그림이 또 하나의 이야기였습니다. 그 순간, 이 책은 한 방향으로 읽는 구조가 아니라 여러 층위로 펼쳐진다는 것을 체감했습니다.

 

이런 구성은 그림책 이론에서 말하는 ‘좌우 대비(bilateral contrast)’와 연결됩니다. 지각대장 존을 보면 그 특징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학교에 가는 길은 자유롭고 생동감 있는 색으로 표현되는 반면, 교실 안은 흑백으로 단조롭게 그려집니다. 화면 속에서 선생님은 점점 커지고, 아이는 점점 작아집니다. 텍스트 없이도 아이가 느끼는 긴장과 위축이 자연스럽게 전달됩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며 “왜 이렇게까지 대비를 했을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다시 보니 이건 단순한 연출이 아니라 아이의 시선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었습니다. 아이에게 학교 밖은 움직이고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지만, 교실 안은 통제되고 조용해야 하는 공간으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그 감각이 색과 크기, 공간의 분리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 좌우의 차이를 ‘이야기가 끊기는 지점’이 아니라, ‘아이의 두 세계가 동시에 존재하는 자리’로 보게 됩니다. 어른의 기준에서는 하나로 이어져야 할 장면이, 아이의 세계에서는 충분히 나뉘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저는 그 차이를 이 그림책을 통해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판타지 세계로 달아나는 아이들 — 상상력이 주는 실질적인 효과

존 버닝햄 그림책에서 아이들은 현실이 답답해지면 어김없이 상상의 세계로 넘어갑니다. 엄마가 잔소리를 늘어놓는 동안 아이는 이미 말을 타고 다른 세계로 달려가 있습니다. 좌우 페이지가 연결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한쪽은 엄마의 현실, 다른 쪽은 아이의 판타지입니다.

 

이 판타지 경험이 단순한 현실 도피가 아니라는 점은 아동 발달 연구에서도 뒷받침됩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연구에 따르면, 풍부한 상상 놀이(imaginative play)를 경험한 아이들은 문제 해결력과 정서 조절 능력에서 더 높은 발달 지수를 보인다고 보고된 바 있습니다(출처: 옥스퍼드대학교 아동발달연구소). 쉽게 말해, 판타지 그림책을 충분히 경험한 아이는 현실의 문제 앞에서 더 다양한 해법을 떠올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국내에서도 그림책이 아동의 정서 발달에 미치는 효과는 꾸준히 연구되어 왔습니다. 한국어린이문학교육학회는 판타지 서사를 담은 그림책이 아이들의 자아 효능감(self-efficacy)과 공감 능력 향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출처: 한국어린이문학교육학회). 여기서 자아 효능감이란 자신이 어떤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말합니다.

 

제가 유치원에서 직접 아이들과 존 버닝햄 그림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도 이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야기 속에서 작고 약한 아이가 상상의 세계에서만큼은 완전한 주인공이 됩니다. 그 경험이 아이들에게 어떤 식으로 내면의 에너지를 채워주는지,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참 그 세계 이야기를 이어가는 아이들을 보며 실감했습니다.

 

존 버닝햄은 어른들을 책 속에서 대체로 권위적이거나 둔감하게 그립니다. 자녀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부모, 자기 기준으로만 아이를 평가하는 선생님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이게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아마 그게 정확히 이 작가가 원한 반응일 겁니다. 저도 책을 읽을 때마다 "나는 어떤 어른이었나"를 돌아보게 됩니다.

 

존 버닝햄의 그림책은 아이들보다 오히려 어른이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상상력과 자기 세계를 지킬 힘을 주고, 어른들에게는 아이 눈높이를 잊고 살았던 시간을 조용히 돌아보게 만듭니다. 지각대장 존 한 권을 두 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첫 번째는 아이와 함께, 두 번째는 혼자서요. 두 번째 읽을 때 보이는 것들이 분명히 다를 겁니다.

 

아이들과 수많은 그림책을 읽어왔지만, 존 버닝햄의 책을 읽을 때면 아이들은 늘 예상보다 훨씬 자유롭게 이야기를 받아들였습니다. 특히 딸과 함께 읽다 보면, 어른인 저는 자꾸 이유를 설명하려 하는데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상상의 흐름을 따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존 버닝햄의 그림책은 아이를 가르치는 책이라기 보다, 어른이 아이의 세계를 다시 배우게 만드는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mpuDohY8pzk&t=9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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