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책이라고 하면 으레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지 않나요? 저도 한동안 그랬습니다. 그런데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동물 그림책을 펼쳤을 때, 이야기보다 정보를 담은 책에 아이들이 훨씬 더 격렬하게 반응한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이 동물은 왜 이렇게 생겼어요?"라고 눈을 반짝이던 그 표정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지식 그림책이란 무엇인가, 단행본으로 봐야 하는 이유
아이들과 지식 그림책을 읽어주다 보면, 같은 ‘정보’를 담고 있어도 책의 형태에 따라 반응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유치원에서 백과사전 형식의 지식 그림책과 이야기 형식의 지식 그림책을 함께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백과사전 형식의 책은 정보가 풍부한 대신, 읽어주는 동안 아이들의 집중이 쉽게 끊어졌습니다. 반면 이야기 속에 정보가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책을 읽어줄 때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다음 장면을 궁금해하며 훨씬 깊이 몰입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때 저는 ‘정보도 전달 방식에 따라 경험이 된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이 경험 이후로 저는 지식 그림책을 고를 때 ‘단행본’ 형태를 더 주의 깊게 보게 되었습니다. 단행본 지식 그림책은 단순히 정보를 모아 놓은 책이 아니라, 한 권 자체가 하나의 완결된 경험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주제를 다루더라도 책마다 글 작가와 그림 작가가 다르기 때문에, 아이는 다양한 시각과 표현 방식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됩니다. 또한 책의 크기와 형태 역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병풍처럼 길게 펼쳐지는 책, 페이지 안에 또 다른 책이 들어 있는 구조, 실제 크기를 비교해 볼 수 있도록 만든 책 등은 단순한 읽기를 넘어 ‘체험’으로 확장됩니다.
예를 들어 진짜 나타났다와 같은 책을 아이와 함께 볼 때, 저는 일부러 책을 크게 펼쳐 놓고 비교해 보곤 합니다. “북극곰 발이 우리 얼굴보다 크네?” 하고 이야기하는 순간, 아이는 단순히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크기를 느끼게 됩니다. 이런 경험은 설명으로는 쉽게 전달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이처럼 지식 그림책에서 말하는 ‘판형’은 단순한 크기나 형태를 넘어서,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 그 자체가 됩니다. 실제로 한국어린이교육문화연구원에서도 그림책의 물리적 형태가 학습 경험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지식 그림책을 고를 때 단순히 “어떤 정보를 담고 있는가”보다, “이 책은 아이에게 어떤 방식으로 경험되도록 만들어졌는가”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단행본 지식 그림책을 선택하는 이유도 바로 그 지점에 있습니다.
전집 vs 시리즈, 어떻게 활용할까
지식 그림책을 고르다 보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전집으로 사야 할까요, 아니면 낱권으로 사야 할까요?” 저 역시 처음에는 이 선택이 꽤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책을 함께 보면서 느낀 점은, 이 둘 중 무엇이 더 좋다기보다 역할이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은 자연관찰 전집을 교실에 펼쳐 놓고 아이들과 자유롭게 살펴보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때 몇몇 아이들이 유독 한 페이지, 북극곰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오래 머무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단순히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반복해서 돌아와 보고, 질문을 던지고,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북극곰을 주제로 한 단행본을 따로 권해주었습니다. 그 이후 반응은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전집에서는 ‘여러 가지 중 하나’였던 관심이, 단행본을 통해 ‘하나의 주제에 깊이 몰입하는 경험’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이 경험을 통해 저는 전집과 시리즈(혹은 낱권)의 역할을 이렇게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전집은 아이의 관심사를 넓게 탐색하게 해주는 도구라면, 낱권이나 시리즈는 그 관심을 깊이 있게 키워주는 도구입니다.
예를 들어 신기한 스쿨버스와 같은 시리즈는 한 가지 주제를 다양한 이야기로 풀어내기 때문에, 아이가 흥미를 느낀 영역을 자연스럽게 확장해 나가기에 좋습니다. 필요한 주제만 골라서 한 권씩 접근할 수 있다는 점도 부담을 줄여줍니다.
그래서 제 경험상 가장 효과적이었던 방법은 이 두 가지를 나누어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집으로 아이의 관심을 ‘발견’하고, 그중에서 반응이 있는 주제를 중심으로 단행본이나 시리즈를 추가해 ‘확장’하는 방식입니다. 전집이 씨앗이라면, 단행본은 그 씨앗을 자라게 하는 물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느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단순히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을 넘어, 아이가 한 주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하도록 돕습니다. 실제로 육아정책연구소에서도 특정 주제를 반복적이고 다양한 맥락에서 접하는 경험이 인지 발달과 사고력 확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느 쪽이 더 좋을까?”보다 “지금 이 아이에게 어떤 단계가 필요할까?”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지식 그림책, 어떻게 읽어줄까
지식 그림책을 읽어주다가 “이거 뭐였지? 기억해?”라고 물어본 적, 저도 있습니다. 아이가 잘 이해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질문을 던지는 순간 아이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는 것을 보았습니다. 방금까지 편하게 듣고 있던 아이가 조용해지고, 답을 찾으려는 눈빛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제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책 읽는 시간이 ‘확인받는 시간’으로 바뀌고 있었다는 것을요.
그 이후로 질문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북극곰은 뭘 먹는다고 했지?” 대신 “북극곰이 이렇게 추운 데서 산다니, 너는 추운 게 좋아, 더운 게 좋아?”처럼 아이의 경험과 연결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반응도 달라졌습니다. 정답을 찾으려는 대신,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고,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저는 지식 그림책 읽기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기억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연결했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책 속 정보를 자신의 경험과 연결하는 순간, 그 지식은 훨씬 오래 남는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독후 활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별한 준비를 하지 않아도, 일상 속에서 충분히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음식이 등장하는 그림책을 읽은 날에는 식탁에서 “이건 뭐로 만들어졌을까?”를 함께 이야기해 보고, 문이 나오는 책을 읽은 뒤에는 밖에 나가서 “이건 회전문이네, 이건 미닫이문이네” 하며 찾아보았습니다.
제가 직접 해보니, 아이들은 이런 작은 연결을 훨씬 더 오래 기억했습니다. 책 속에서 본 것이 현실과 이어지는 순간, 그 경험이 아이에게 하나의 ‘자기 지식’으로 자리 잡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지식 그림책을 읽어줄 때 한 가지를 더 생각하게 됩니다. “이 내용을 어떻게 외울까?”가 아니라, “이 이야기를 아이의 삶과 어떻게 연결해 줄까?”라는 질문입니다. 그 차이가, 책이 지식으로 남을지 경험으로 남을지를 결정한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읽기 확장의 방향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전집에서 아이가 유독 관심 보이는 주제를 발견한다.
- 그 주제와 관련된 단행본이나 시리즈물을 추가로 찾아 읽는다.
- 같은 주제의 창작 그림책도 함께 읽으며 사실과 상상의 차이를 경험하게 한다.
- 책에서 만난 주제를 일상 속 실물과 연결하는 활동으로 이어간다.
이런 식으로 읽기를 확장해 나가면, 지식 그림책과 창작 그림책이 자연스럽게 섞이면서 아이의 독서 스펙트럼이 넓어집니다. 이 과정을 기록해두면 소위 그림책 거미줄, 즉 아이의 관심사가 책과 책 사이를 어떻게 연결해 가는지 눈에 보이는 지도가 만들어집니다.
결국 지식 그림책의 가치는 정보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아이가 세상에 대해 스스로 궁금해하도록 만드는 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책이 좋은지 고민하기 전에, 지금 우리 아이가 무엇에 눈을 반짝이는지를 먼저 살펴보시길 권합니다. 그 관심사에서 출발하면, 전집이든 단행본이든 시리즈든 어떤 형태의 지식 그림책이든 자연스럽게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유치원 교사로 아이들을 지켜보며 느낀 것은, 아이들의 배움은 어른이 계획한 순서보다 '좋아하는 마음'에서 훨씬 강하게 시작된다는 점입니다. 딸 역시 한동안 곤충 그림책에 깊이 빠졌는데, 그 관심이 자연스럽게 자연관찰책, 만들기 놀이, 실제 곤충 채집과 관찰로까지 이어지는 모습을 보며 책 한권의 힘을 다시 실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독서교육의 핵심은 많은 책을 읽히는 데 있기보다, 아이의 작은 호기심 하나를 놓치지 않고 오래 이어갈 수 있도록 곁에서 함께 연결해주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