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처음에는 '컵 하나로 뭘 할 수 있겠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들과 그림책을 펼치고 실제 컵을 교실에 꺼내 놓았더니,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가 쏟아졌습니다. 『컵? 컵!』,『컵이 뭘까?』 그림책을 활용한 탐색 놀이가 어떻게 아이들의 창의적 사고와 소근육 발달로 이어지는지, 제 경험과 함께 나눠보겠습니다.

컵? 컵! 과 컵이 뭘까? 그림책 놀이, 탐색 놀이: 평범한 컵이 상상의 도구가 되는 순간
그림책 수업 전날, 저는 투명 컵, 종이컵, 플라스틱 컵, 손잡이 있는 머그컵까지 종류별로 한 세트씩 준비했습니다. 아이들에게 그냥 컵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먼저 책 속 이야기를 통해 "이건 당연히 물 마시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한번 흔들어 주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컵이 뭘까?』를 읽을 때였습니다. 책 속에서 스푼 없이 코코아를 섞어야 하는 장면이 나오자 아이들이 갑자기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그럼 너희는 어떻게 할 것 같아?"라고 물었더니, "흔들어요!", "빨대로 저어요!", "손가락으로요!"라는 대답이 동시에 터져 나왔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열린 질문 하나가 30분짜리 이야기 나눔을 만들어 냅니다.
여기서 이 책이 중요하게 다루는 개념이 바로 디자인 씽킹(Design Thinking)입니다. 디자인 씽킹이란 일상 속 불편함을 단순히 참고 넘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으로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책을 찾아가는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이 그림책의 저자가 디자이너 출신이라는 사실이 여기서 빛을 발합니다. 단순히 "컵은 이렇게 씁니다"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이 컵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계속 묻는 구조로 되어 있거든요.
그림책을 덮은 뒤, 저는 실제 컵들을 꺼내 아이들 앞에 늘어놓았습니다. "이 컵은 언제 사용할까?"라고 물었더니 "물을 마셔요"라는 대답이 먼저 나왔지만, 조금 기다리자 "꽃을 꽂을 수 있어요", "전화기처럼 할 수 있어요", "눈을 가리는 망원경이요"라는 말들이 나왔습니다. 이 순간이 제가 이 활동을 계속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유아기 아이들에게 중요한 인지 발달 개념 중 하나가 상징적 사고(Symbolic Thinking)입니다. 상징적 사고란 눈앞에 있는 사물을 실제와 다른 것으로 대체하여 사용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 능력이 발달할수록 놀이의 깊이와 언어 표현력이 함께 성장합니다. 아이들이 컵을 망원경이나 로켓으로 상상하는 장면이 바로 이 상징적 사고가 작동하는 순간입니다.
아이들이 그림책을 통해 탐색 놀이로 넘어갈 때 경험하게 되는 핵심 발달 영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인지 발달: 사물의 기능을 재해석하고 새로운 용도를 상상하는 확산적 사고 훈련
- 언어 발달: 자신의 아이디어를 말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어휘와 문장력 성장
- 사회성 발달: 다른 친구의 아이디어를 듣고 "나는 생각 못 했는데!"라는 경험 반복
- 소근육 발달: 컵을 쌓고, 잡고, 조작하는 과정에서 손과 눈의 협응력 향상
실제로 유아기의 놀이 중심 학습이 인지적 유연성과 창의성 발달에 효과적이라는 것은 연구로도 뒷받침됩니다. 유아기 놀이 경험이 이후 학습 준비도(School Readiness)와 높은 상관관계를 보인다는 점은 교육 현장에서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출처: 한국유아교육학회).
창의적 사고와 미술 활동: 컵 하나가 작품이 되기까지
탐색 놀이가 끝난 뒤 저는 종이컵을 한 개씩 나눠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컵을 마음대로 꾸며보자"라고 했을 뿐인데, 아이들의 반응은 제가 예상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어떤 아이는 컵 옆면에 창문을 그려 넣고 "로켓이에요"라고 했고, 어떤 아이는 귀와 코를 붙여 곰 얼굴을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컵을 뒤집어서 "이게 집이에요, 지붕이잖아요"라고 말한 아이도 있었습니다.
미술 활동 측면에서 이 놀이가 의미 있는 이유는 조형적 사고(Formative Thinking)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조형적 사고란 3차원 공간과 형태를 머릿속에서 구성하고 조작하는 능력으로,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아이들이 컵이라는 입체 형태를 가지고 새로운 사물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바로 이 조형적 사고를 자극합니다.

『컵? 컵!』 그림책에서도 이런 접근이 잘 드러납니다. 색깔과 크기, 모양이 다른 컵들이 각자 자신을 소개하고, 서로 합쳐져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가는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다름이 틀린 게 아니라 각자 다른 역할이 있다"는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전달합니다. 제가 직접 이 책들을 아이들과 읽어보니, 이 부분에서 아이들이 자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더라고요. "저는 파란 컵이에요!", "저는 큰 컵이에요!" 하면서요.
컵 쌓기 활동도 해봤는데, 이건 제가 예상보다 훨씬 오래 걸린 활동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컵 30개를 가지고 탑을 쌓는 데 거의 40분을 썼습니다. 무너지면 다시, 또 무너지면 또다시. 그런데 한 번도 "그만할게요"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자기 조절력(Self-Regulation)이 자연스럽게 연습되는 순간입니다. 자기 조절력이란 좌절감이나 충동을 스스로 다스리고 목표를 향해 지속하는 능력으로, 유아기에 이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이후 학습 태도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놀이 기반 학습(Play-Based Learning)이 유아의 전반적 발달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는 이미 여러 기관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아기 놀이 경험의 중요성과 발달적 가치에 대해서는 교육부가 발행한 누리과정 해설서에서도 명확히 다루고 있습니다(출처: 교육부 누리과정).
그림책 연계 미술 활동을 할 때 제가 느낀 가장 큰 장점은, 아이들이 "뭘 그려야 해요?"라고 묻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책 속 이야기가 이미 상상의 씨앗을 심어두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그 씨앗을 자기 방식으로 꽃 피울 뿐입니다. 이게 바로 그림책이 단순한 읽기 자료를 넘어 놀이와 창작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컵 하나, 그림책 한 권이 교실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경험의 폭은 생각보다 훨씬 넓습니다. 아이들 각자가 같은 컵을 보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창의적 사고가 특별한 재료나 특별한 환경에서 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한번 직접 교실에서, 혹은 집에서 컵 몇 개와 그림책 한 권을 꺼내 아이와 나눠보시기를 권합니다. 예상 밖의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xn8vGtjRSTA&list=PLYL5HwiWwpBJx8DUDqZ_fbmYC_bHdqH1_&index=134